[아침햇발] '불쌍한 집부자와 기업주'만 보이는가 / 정남구

정남구 2021. 12. 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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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와 콜린 크룩스 주북영국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남구 | 논설위원

네팔에 ‘쿠마리’라는 이름의 살아 있는 여신이 있다. 4~5살에 ‘왕국의 수호 여신으로 부활’한 이로 뽑히면, 부모와 떨어져 사원에서 살며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초경을 시작하면 신성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간 것으로 여겨져 후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원을 떠나야 한다. 그 뒤의 삶은 대체로 비참하거나, 행복과 적잖은 거리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쿠마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당선해 권력을 손에 쥐면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정권 말기에 이르면 실망과 배척을 피하지 못했다. 한국갤럽의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률 조사 결과를 보면,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뽑힌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모두 집권 마지막 해 지지율(분기 평균)이 30%를 밑돌았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대통령은 6%로 마감했다. 그나마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20%대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말 4%까지 떨어진 뒤 탄핵으로 임기를 못 채우고 하차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차 2분기 긍정률이 39%다. 역대 대통령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 교체’ 여론이 ‘여당의 정권 재창출’ 여론을 웃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는 그만큼 유리한 지형에 서 있다. 그런 까닭에 윤 후보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을 등에 업는 것을 넘어, 실패하지 않을 정치를 어떻게 구상하는지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지금까지 움직임을 보면 적잖이 아쉽다. ‘좌우를 두루 잘 돌아보는’ 분이 왜 ‘불쌍한 집부자·기업주’와만 눈을 맞출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 후보는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오래 검사로만 일해 정책을 잘 모르지 않느냐는 지적에 ‘걱정할 것 없다’고 대답하는 차원에서 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정책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말이 모호해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큰 방향은 손에 잡힌다.

집값 불안은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실정으로 꼽힌다. 불만이야 여러 방향에서 나오지만, 가장 고통이 큰 것은 집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윤 후보는 집값이 올라 세금 부담이 커진 ‘불쌍한 집부자’ 걱정에만 온통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집값을 안정시키고 ‘부동산 투기 공화국’과 작별하는 복안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부동산 문제는 50년 묵은, 우리나라의 최대 골칫거리다.

노동과 노동자를 보는 시각은 아주 옛날을 사는 사람 같다. 윤 후보는 지난 7월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맘껏 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주 52시간제에 매우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최저임금제에 대해서도 “더 낮은 조건에서 일할 의사가 있는 분들도 일을 못 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속도 조절 필요성을 넘어,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짙게 묻어난다. 중소기업, 소규모 자영업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상쇄할 처방들은 늘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국가 지도자라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 그에 따르는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먼저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성적으로 민간소비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내수 부진의 나라, 그것은 노동자들의 낮은 소득에서 비롯한다. 빈곤과 격차 확대에 대한 걱정이 아직까지 한마디도 없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 아닌가.

윤 후보는 지난 1일 충북 기업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상속세 부담으로 중소기업 경영 유지가 어렵다”며 상속세 완화 계획도 밝혔다. 우리나라에선 2014년 이른바 가업 상속 공제 대상을 크게 확대하는 쪽으로 세법을 개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이지(EG) 회장의 자녀가 상속받을 때 큰 혜택을 입게 한 조처라고 해서 뒷말이 많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처럼 ‘가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의미 없이 상속세를 깎아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걸 또 확대하겠다는데, 내겐 상속제도를 잘 몰라 부모가 진 거액의 빚을 물려받은 이들의 눈물 어린 얼굴이 겹친다.

윤 후보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그저 권력투쟁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시대의 과제와도 정면으로 마주하기 바란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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