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갈등 중재 '한걸음 모델' 한발 내딛긴 한겁니까

김정훈 기자 2021. 12. 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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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합의 이뤄냈다는 5가지 사례 살펴보니..

3년을 끌어오던 온라인 안경 판매 논란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2019년 온라인 안경 판매 업체가 등장해 가상 착용 기술을 이용한 사업을 ‘규제 샌드박스(일정 기간 규제 없이 사업)’에 선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미국에서는 2010년부터 가능한 사업인데, 국내에서는 도수가 있는 안경은 의료기기라 안경점에서만 팔아야 한다는 규정이 가로막았다. 안경사협회가 “온라인 안경 판매를 허용하면 안된다”고 반발해 규제 샌드박스 선정이 보류됐다.

온라인 안경 판매, 드론 택배 등 신사업은 국내에서 불가능하다. 정부 규제도 문제지만, 기존 사업자들의 반발을 넘어서기 어렵다. 정부가 이런 갈등을 풀어보겠다며 만든 ‘한걸음 모델’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미국의 안경 온라인 판매 업체 와비파커의 안경 샘플(위쪽)과 강원도 영월에서 시험비행을 하고 있는 드론의 모습. /와비파커·조선일보 DB

그 뒤 기획재정부가 나섰다. 신사업 출현으로 발생하는 기존 사업자들과의 이해 충돌과 갈등을 중재한다는 ‘한걸음 모델’에 선정하고 조정 역할을 자임했다. 지난 7월부터 8차례 회의를 했고, 지난달 30일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합의문은 빈 수레라는 지적을 받는다. 안경 전자 상거래가 국민 눈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 용역을 실시해 보겠다는 것이 거의 전부라서다.

용역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또 결과가 나와도 일단 ‘규제 샌드박스’ 사업으로 선정해 2년 정도 해보고 그 뒤에 관련법 개정을 거쳐야 한다. 최소 3~4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안경 판매 업체에서는 “법 개정 과정에서 안경사협회가 반대하면 결국 무산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안경사협회 관계자는 “도수 있는 안경은 전문 안경사가 다뤄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한걸음 모델로 합의를 이뤘다고 하지만 반걸음도 못 디딘 것이다. 지금까지 한걸음 모델을 거쳤던 5가지 사안의 공통점이다.

◇정부가 만든 규제 풀면서 생색

정부는 지난달 초 드론 택배에 대한 한걸음 모델 합의안을 발표했다. 현행 생활물류법에 따르면 드론은 택배 배송 자격이 없다. 용달 업계도 법 개정에 반대해 왔다. 드론 업체와 용달 업체 등이 5차례 만난 끝에 만든 합의문은 “택배 차량이 들어가기 힘든 오지에는 드론이 배달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사업성 있는 도심 지역은 안 되고, 산간·섬 지역만 드론 배송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차피 지금도 택배차는 산간이나 오지에 택배를 배달하지 않는다. 신사업을 하려는 업계 측에서는 “이게 무슨 해결이냐”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합의를 두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코로나 위기 이후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드론을 활용한 생활 물류 서비스 혁신’에 성과가 있었다”고 자화자찬했다.

사실 올해 초 생활물류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드론은 원래 택배가 가능한 법적 운송 수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택배 업계 등의 반발로 막판에 빠졌다. 다른 나라에선 드론이나 자율주행로봇 배달 상용화를 본격 실험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올해 드론을 배달 업무에서 제외하는 규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김태기 단국대 명예교수는 “신사업이 등장하면 정부가 앞장서 법과 규제부터 만들어 내면서 그걸 하나 풀어줬다고 생색내는 꼴”이라고 했다.

◇한걸음, 합의문 실적 쌓기로 전락

한걸음 모델이 사회 갈등을 풀기보다는 합의안 도출이라는 실적 쌓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한걸음 모델에 들어온 사안이었던 ‘도심 내국인 공유 숙박’ 건은 민관 협의체를 구성한다는 선언에 그쳤다. ‘농어촌 빈집 숙박’은 5개 시군구에서 총 50채 이내 시범 사업을 허용하는 데 머물렀다. 하동군이 지역 관광 활성화 차원에서 지리산 형제봉 일대에 전기열차, 케이블카, 모노레일을 설치하겠다는 알프스 프로젝트는 7차례 전체 회의, 30차례 가까이 소규모 회의를 연 끝에 ‘하동군은 현행 법령 내에서 사업 계획을 축소한다’는 합의문을 내놓았다. 법이 바뀌지 않으면 추진하지 못하는 사업인데도 현행 법령을 지키라고 하는 합의문을 도출해 낸 것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는 “정부가 전문성과 정책 의지를 가지고 갈등 사안을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며 “정부가 이익집단만 바라보고 합의만 강조하다 보면 결국 침묵하는 국민 다수의 이익이 침해되고 국가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걸음 모델

온라인 등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자가 등장해 기존 사업자들과 갈등이 벌어지면 정부가 중재해 상생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작년 6월 시작한 이해관계 조정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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