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피노체트, 닮은듯 다르다[광화문]

배성민 기자 2021. 12. 1.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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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한 기간에는 삼청교육대와 대학생 등의 군 강제징집(일명 녹화사업), 노동운동 말살 등 인권탄압이 자행됐고,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으로 죄 없는 민간인과 대학생들이 투옥되고 인생을 잃었다.

피노체트의 17년간의 강압적인 군사독재로 약 31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고문 피해자도 수 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피노체트에 이어 전두환까지, 그들은 무시했고 역사의 죄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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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서대문지역 제 단체 회원들이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 사저 앞에서 '전두환은 죽어도 5.18 광주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1.11.26/뉴스1


# 지난 23일 11, 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다. 12.12 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 강제진압 등으로 권좌에 오른뒤 8년여의 강권통치로 일관했던 독재자였다.

재임한 기간에는 삼청교육대와 대학생 등의 군 강제징집(일명 녹화사업), 노동운동 말살 등 인권탄압이 자행됐고,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으로 죄 없는 민간인과 대학생들이 투옥되고 인생을 잃었다. 언론통폐합과 보도지침 강요 등 인위적인 언로의 폐쇄, 대기업들로부터 거둔 천문학적인 비자금 등 실정을 헤아릴수 없다.

백담사 유배로 역사의 법정에만 설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새로운 시대 흐름 속에 현실의 법정에 섰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정치보복은 없다'는 새로운 통치자의 등장으로 1997년 말 사면돼 그뒤로 20여년을 자연인으로 살다 삶을 마감한 것이다. 물론 광주학살 등에 대해 궤변으로 일관해 진상규명의 문을 닫아걸며 또다른 역사 앞의 죄를 지었다는 비난을 산 채였다.

# 전두환과 비슷한 시기에 권좌에서 물러났던 지구 반대편의 독재자가 있었다.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그 사람이었다. 집권의 과정은 전두환과 유사했다. 피노체트는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된 사회주의 정부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1973년 9월 쿠데타로 붕괴시켰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에 총을 들고 맞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칠레의 대통령 관련 기록물 중에는 피노체트군에 저항하다 사망한 아옌데 대통령의 깨진 안경이 상징처럼 남아있다.

집권 이후 피노체트의 강권통치는 전두환 못지 않았다. 피노체트의 17년간의 강압적인 군사독재로 약 31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고문 피해자도 수 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실종자 1100여명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못지 않은 1980년대의 칠레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그는 1989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자신의 계속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를 물었다. 하지만 민주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바람이 작동하며 '연임 지지'라는 선택을 받지 못 했고 피노체트는 이후 상당기간 군 총사령관과 종신 상원의원직을 갖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외면 속에 정치적 낭인생활을 해야 했다. 국내에 계속 머물수 없어 영국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체포, 구금되는 수모를 겪었고 2000년 3월 건강 사유로 석방되어 칠레로 귀국해 2006년 사망했다.

# 전두환과 피노체트는 두 사람 모두 90년 가까이 살면서 사실상 천수를 누렸고 무력을 바탕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점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다.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이지만 내란죄로 처벌을 받은 전력 때문에 장례도 가족장으로 치렀고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 했다. 아직 장지를 결정하지 못해 화장 후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된 상태다. 칠레 정부는 당시 피노체트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지 않을 것이며 3일간의 공식 애도기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피노체트 스스로도 자신의 묘지가 훼손될까 겁내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가족 소유의 땅에 묻혔다.

다른 점도 있다. 아직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2018년 칠레 대법원은 피노체트 가족으로부터 미화 약 160만 달러(약 19억2000만원)를 압수하라는 판결을 내린 상태다. 반면 전두환 비자금 중 추징금 900억여원은 회수될지가 불투명하다.

헌법의 운명도 다르다. 칠레 헌법은 빈부격차가 심화된데다 2019년 일명 50원 시위(지하철요금 30페소 인상 반발에 따른 시위) 등 변화요구가 분출하며 국민투표 이후 개헌작업이 진행 중인 반면 한국의 87년 헌법은 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며 개정 여부가 요원하다.

결정적으로 피노체트는 자신의 91번째 생일을 맞아 과거 집권기간 행동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책임'을 인정한다는 성명을 냈고 보름여뒤 세상을 떠났다. 반면 전두환은 학살과 권력남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 없이 도리어 회고록을 통해 희생자들을 모욕했다.

권력자로서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 했다. 1982년 당시 김상협 국무총리가 칠레를 방문해 피노체트에게 방한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을 이끌어냈지만 물리적인 거리로 이행되지 못 했다.

공교롭게도 백담사에서 내려온 전두환이 국회에서 광주의 진실과 5공화국의 비리 등과 관련해 증언을 하기 직전인 1989년 연말에 공중파에서 영화 한편이 방영됐다. 1973년 칠레 쿠데타를 다큐형식으로 다룬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이는 쿠데타 세력들간의 거사의 암호기도 했다)였다. 피노체트의 뜻과는 상관없지만 전두환이 이번만은 진실을 말하라는 국민들과 언론의 묵시적 압력이기도 했다. 그때도 현재도 진실은 묻혔다.

피노체트에게 항거하던 아옌데가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연설 중 한 부분이다. '방심하지 말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국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독재자에 대한 일갈이자, 국민들에 대한 호소였다. 피노체트에 이어 전두환까지, 그들은 무시했고 역사의 죄인이 됐다.

배성민 에디터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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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민 기자 baesm1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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