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연공서열 파괴

강경희 논설위원 2021. 12. 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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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 전무 직급을 다 없애고 임원 명칭을 부사장으로 단일화한 SK그룹 계열사에서 한 임원이 한동안 명함을 3개 들고 다녔다. 원래는 상무급인데 곧바로 부사장 타이틀을 달게 돼 어색한 상황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부사장 명함을 내밀기 쑥스러운 자리에는 ‘상무’ 명함을, 높은 직책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한테는 ‘부사장’ 명함을, 내부 사정 뻔히 아는 계열사 사람한테는 ‘OO 담당’이라고 새긴 명함을 줬다고 한다.

▶서열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기업들은 수평적이고, 능력 중심 조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의 직급 체계를 없애고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한 곳도 있고, 영어 이름을 쓰는 곳도 있다. CJ는 21년 전부터 직급 호칭 대신 ‘님’ 자를 붙여 불렀다. 보수적인 은행권도 뒤늦게 합류했다. 하나금융그룹은 지난해부터 직급 호칭 없이 ‘영어 별칭’을 부른다. 김정태 회장은 이름 영문 이니셜을 따 ‘JT’로 불린다.

▶상사가 부하 직원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수직적 문화를 파괴하려 동료 평가, 360도 평가 등이 도입되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영어 이름 쓰면서 개방적인 조직 문화로 알려졌던 카카오는 연말 동료 평가에 “이 동료와 다시 함께 일하시겠습니까”라는 문항이 있고, 그 결과를 본인에게 알려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올 초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 방식이 잔인하다며 유서 형식 글을 띄웠다.

▶2012년 미국의 ‘배니티페어’ 잡지에 ‘마이크로소프트(MS)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구글이나 애플이 급부상하는 동안 MS가 뒤처진 이유 중 하나가 ‘스택 랭킹’이라는 상대평가 제도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MS는 직원을 1~5등급으로 나눠 최하 등급을 내쫓았다. 이 엄격한 상대 평가로 협업 분위기는 사라지고, 구글 등 외부의 IT 강자들과 경쟁하는 대신 내부 정치만 횡행하는 기업 문화가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MS는 이 상대평가 제도를 폐지했다.

▶인사 제도는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다. 삼성전자가 ‘연공서열 파괴’ 인사 개편안을 발표했다.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동료 평가를 시범 실시하며, 해당 직급에 8~10년씩 일해야 하는 직급별 승진 연한을 폐지해 30대에 임원이 될 수도, 40세에 CEO가 될 수도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40세 여성 CEO가 나오는 시대다. 거대 항공모함처럼 조직 문화가 더디게 바뀌던 삼성전자도 더 이상 변화를 거스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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