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사람들 - 양귀자 [엄재식의 내 인생의 책 ③]

엄재식 |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2021. 11. 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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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였기에 버틴 그 시절

[경향신문]

형제슈퍼 맞은편에 서울미용실이 있고, 소방도로를 끼고 구부러지면 종합화장품 할인 코너가 있다. 서울미용실 경자가 친구와 동업해 낸 가게다. 이 자리엔 원래 인삼찻집이 있었고, 행복사진관 엄씨와 진한 연애를 한 탓에 찻집 여자는 동네를 떠났다. 김포쌀상회가 김포슈퍼로 이름을 바꿨고, 원미지물포와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우리정육점이 모여 있는 곳이 원미동 23통이다.

<원미동 사람들>이 처음 나온 것은 1987년이었다. 그때 우리 사회는 아주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지금 보기에 당시 상황은 ‘레트로’에 ‘복고 열풍’으로 보이겠지만, 원미동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뀌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삶을 보여준 것처럼 <원미동 사람들>은 부천 원미동 23통의 삶을 드러내 보인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그때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좁은 길을 달리는 자전거처럼 위태로웠다.

위태로운 삶을 그나마 견딜 수 있도록 한 것은 서로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있는 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단편 중 ‘일용할 양식’에서 형제슈퍼와 김포슈퍼는 제 살 깎기 할인 경쟁을 벌이다 새로 개업한 싱싱청과물에 대항해 ‘연대’를 맺어 해결한다. 결국 주먹이 오가고, 싱싱청과물이 폐업하고, 새로 생기는 전파상 때문에 써니전자 시내 엄마가 울상인 것으로 끝나지만, 원미동은 슬픔 속에서 따뜻함이 피어오르는 곳이다.

지금 ‘원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더 익숙한 삶이 됐다. 원미동 골목을 채운 소설 속 간판을 떠올려본다. 행복과 형제, 써니와 김포, 우리, 그리고 서울과 강남. 이제 우리 주변의 간판들은 각종 프랜차이즈 이름으로 바뀐 지 오래다. 모두가 비슷해져버린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다.

엄재식 |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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