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권모 칼럼]'닥치고 이재명' '묻지마 윤석열'
[경향신문]
한 번도 경험 못한 대선이 석 달여 남았다. 어쩌면 “조선 왕조 500년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긴 시간이다. 벌써 화석처럼 굳어지는 흐름이 있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 지지층의 결집도가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8할가량이 ‘계속 지지하겠다’는 절대 지지층이다. 계속 불거지는 치명적 흠결과 실언, 후보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검찰·공수처 수사가 남아 있음에도 ‘닥치고 이재명’, ‘묻지마 윤석열’로 진영 대결이 첨예해지고 있음이다. 아마도 내년 3월9일 대선은 진영 투표의 성격이 여느 선거보다 강력하게 표출될 것이다.
진영 대결이 극단화되는 데 맞춰 대선전이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다. 후보끼리 대놓고 “당신은 감옥에 갈 것”이라고 공박한다. 소시오패스 정신병자, 사기꾼, 파렴치범, 무식자, 조폭 변호사, 가족사기단, 살인자 가족 등 주고받는 언어에는 온통 핏빛 적의가 넘실댄다. 공존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응징과 절멸의 대상으로 보니 증오 마케팅이 선거전을 지배하고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상대 후보들의 사소한 의혹만 불거져도 고발장을 들고 검찰로 달려간다. 유력 대선 후보가 이렇게 많은 사안의 ‘피고발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피의자’ 신분이 된 적도 없다. 상대를 악마로 몰아가는 네거티브로 점철된 선거에서 정책과 비전 경쟁이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지난 10월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전 세계 17개 선진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갈등’ 조사 결과를 내놨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나타났다.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하거나 매우 심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0%에 달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절실했던 ‘통합’의 메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고, 특히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세 대결로 상징되는 정치적 양극화는 결국 이번 대선을 최악의 진영 대결로 치러지게 만들었다.
조국 사태의 반대편 주인공인 윤석열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대선은 진영 간 사생결단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은 보수층의 분노, 증오, 응징, 복수심 등 부정적 에너지의 응축이다. 진즉에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길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떤가”라고 했다. 가족 문제, 잦은 실언, 비틀린 역사인식, 철학의 빈곤, 정책 현안에 대한 무지 등 결정적 실수와 자질 결함이 드러났지만 윤석열의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석열은 후보로 확정되고 나서도 이재명을 겨냥하는 대신 ‘반문재인’에 초점을 맞춘 과거 심판형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반문’ 정권교체 깃발만 펄럭이며 보수층의 분노를 동원하려는 전략이다.
어찌 보면 이재명도 진영 정치의 수혜자다. 여권 세력의 ‘배신자 윤석열’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능함과 더불어 적폐청산을 밀고나갈 이재명의 ‘전투력’이 그를 여당 대선 후보에 올려놓았다. 민주주의 리더십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 설득과 공감 능력보다 돌파형 자질이 소구된 것이다.
진영 정치의 양극에 자리하는 이재명과 윤석열의 대결 구도는 필시 정치 양극화를 극한으로 몰아갈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진영 대결이 더욱 격화되게 만들 토양이다. 통합이나 화합의 DNA가 애초에 없어 보이니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분열과 적의를 국정 동력으로 삼은 미국 트럼프 시대의 모습이 한국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서로를 공존 불가능한 적으로 보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윤석열이 보수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180석 거대 야당의 반대와 저항에 직면해 국정을 제대로 이끌기 힘들 터이다. 극한 갈등과 사회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뻔히 내다보이는 지옥도를 피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 화끈한 공약과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진영 정치를 넘어설 통합의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가 어디에도 없다.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 수술 같은 근본적 대안,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거대한 청사진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진영 갈등과 정치 양극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통합의 정치를 다짐이라도 하는 후보를 보고 싶다.
양권모 편집인 sul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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