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 나란 존재란 무엇입니까

한겨레 2021. 11. 3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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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소녀가 있다 . 자기가 누구인지 아득히 모르는 채 ' 적막한 들 ' 을 홀로 바장이던 외로운 소녀 . 그 아이가 뒷날 얻게 된 이름은 ' 오늘이 ' 다 . 신화의 제목은 ' 원천강본풀이 '.

다음은 연화못의 연꽃나무 . 가지마다 꽃봉오리는 잔뜩 맺혔는데 피어난 것은 한 송이뿐이다 . 나무는 그 꽃송이를 부여잡고서 눈물을 흩뿌린다 . 다른 나무들은 저렇게 꽃이 많은데 , 다른 이들은 저렇게 가진 게 많은데 나는 왜 이것뿐이냐고 . 이것마저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냐고 . 그 울음은 슬플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그 한 송이 꽃은 지게 돼있으므로 . 그 역시 어린 나그네에게 매달린다 . " 원천강에 가거든 어떻게 해야 남들처럼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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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존재의 무의미와 생명적 영원성 사이

황막한 세계 속, 먼지알 같은 나

아득한 옛날의 자연만물 탄생으로부터 현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연재앙 코로나까지 대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저 크나큰 대자연 속에서 ‘나’ 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천문학자들이 우울증에 잘 걸린다는 얘기도 있거니와, 저 높은 곳에서 보면 한 명의 인간은 개미 한 마리만큼의 존재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구식 감수성이겠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_Kansas

끝없는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 바람 속을 부유하는 먼지 한 톨... 광대한 자연 속의 인간이란 이런 존재가 아닐지. 따뜻한 어머니처럼 인간을 감싸는 것이 자연이고 신(神) 이라지만, 그 무심한 황막함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먼지처럼 떠돌다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지는 것이니 크게 보면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미미함!

인간존재의 미약함은 신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화두를 이룬다. 세상에서 제일 존재감이 큰 인물이었을 대영웅 길가메시가 아득히 먼 길을 떠난 것은 포말처럼 스러질 존재의 미력함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끝없이 산 위로 바윗덩이를 끌어올리다가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는 또 어떤지. 그것이 거대한 신 앞에 선 인간의 원형적 운명일지 모른다.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길은 또 왜 그리 험난했는지…….

지상에서 인간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 또한 존재의 미력함에 따른 방황을 피할 수 없었다. 황량한 광야를 정처없이 떠돌면서 그는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하늘이시여!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내 앞에 도대체 길은 있나요?” 허름한 마굿간 구석에서 태어나서 말 밥그릇(구유) 에 뉘여진 그였음을 생각하면 그 존재적 방황이 더 큰 절실함으로 마음을 뒤흔든다.

황막한 세상 속의 미력하고 아픈 나. 이러한 존재적 화두를 수많은 뭉클한 신화로 풀어낸 민족이 있다. 바로 한겨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겨레 민중. 한국의 민간신화에는 세상의 크나큰 파고(波高)를 홀로 감당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이 있다 .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무참하게 버림받은 바리데기, 아비 없이 태어난 어린 노예 신산만산할락궁이, 쉼없는 간난신고에 아득히 휘둘리는 지장아기, 자비없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무인도에 던져지는 궁산이, 등등.

그리고 한 소녀가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득히 모르는 채 ‘적막한 들’ 을 홀로 바장이던 외로운 소녀. 그 아이가 뒷날 얻게 된 이름은 ‘오늘이’ 다. 신화의 제목은 ‘원천강본풀이’. 자연 또는 우주라는 거대한 황무지 속에서 ‘나’ 라는 존재란 과연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하는 원형적 신화다.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은.

오늘이가 만난 존재들, 너나없이 흔들리고 있는

소녀가 발견된 곳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들판이었다. 일컬어 적막한 들. 그 곁에 있는 것은 학 학 마리뿐.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소녀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부모도, 생일도, 나이도, 이름도.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었다. 그냥 그렇게 움직여왔을 뿐이었다. 적막한 들 속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한 알의 먼지처럼.

“너는 태어난 날을 모르니 오늘을 생일로 하고 이름을 오늘이로 하자.”

이렇게 ‘오늘이’ 가 된 소녀는 어느 날 먼 여행을 떠난다. 제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나의 부모는, 또는 하늘 [神] 은 왜 나를 이 크고 적막한 세상에 훌쩍 던져놓고서 아무 말도 없는지를 묻기 위해서. 신화는 오늘이가 찾아 나선 그곳을 ‘원천강’ 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원천을 알 수 있는 곳. 하지만 산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오늘이는 간다. 온몸을 다해서. 왜냐하면 이 상태로 부유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므로.

원천강을 찾아서 홀로 길을 떠난 오늘이는 여러 존재들을 만난다. 별층당에서 글만 읽는 도령을 만나고, 연못 가에서 한 송이 꽃을 매단 채 울고 있는 연꽃나무를 만나며, 여의주(야광주) 를 세 개 물고도 용이 되지 못하는 큰 뱀(이무기) 을 만난다. 청수바다를 건넌 뒤 별층당에서 글만 읽는 처녀를 만나며, 우물가에서 깨진 바가지를 들고 우는 선녀들을 만난다. 그들은 너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력한 제 존재를 한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형상은 현실 속 인간존재의 모습을 원형적으로 표상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나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이야기, 자기서사를 만날 수 있다.

먼저, 별층당에서 글만 읽어야 했던 도령과 처녀. 그 이름은 장상이와 매일이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나 좋은 팔자 같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그 삶 속에 아득히 갇혀 있다. 무언가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중이겠으나 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서 벗어나자니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늘 해온 일이 그것이므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감옥이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감옥. 그래서 그들은 원천강을 찾아가는 어린 나그네에게 매달린다. “원천강에 가거든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봐 주세요!”

다음은 연화못의 연꽃나무. 가지마다 꽃봉오리는 잔뜩 맺혔는데 피어난 것은 한 송이뿐이다. 나무는 그 꽃송이를 부여잡고서 눈물을 흩뿌린다. 다른 나무들은 저렇게 꽃이 많은데, 다른 이들은 저렇게 가진 게 많은데 나는 왜 이것뿐이냐고. 이것마저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냐고. 그 울음은 슬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한 송이 꽃은 지게 돼있으므로. 그 역시 어린 나그네에게 매달린다. “원천강에 가거든 어떻게 해야 남들처럼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청수바닷가의 이무기.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을 홀로 뒹굴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 나는 왜 여의주를 세 개나 물었는데 용이 안 되는 거지? 다른 이들은 하나만 물고도 용이 되는데 말이야! 원천강에 가면 꼭 알아봐 줘.” 보나마나 그 몸에는 상처가 한가득일 것이다. 하늘로 날아보려고 발버둥치다가 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을 터이므로. 어떻게든 높이 올라가보려고, 보란 듯 성공을 이뤄내보려고 이것저것 좋다는 것을 열심히 붙잡아보지만 돌아오는 건 제 몸도 못 가누는 무력한 무거움뿐. 이런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인지.

다음은 우물가의 선녀들. 하늘나라 높은 곳에서 화려하게 살다가 갑자기 땅으로 떨어진 이들이다 . 다시 하늘로 오르려면 우물의 물을 다 퍼내야 하는데 그들은 그 일을 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레박 바가지가 깨졌으므로.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좋았던 시절들을 돼새김질하면서 한탄하는 것뿐이다. “아아, 내가 여기서 이럴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잘나가던 내가 이런 신세가 되다니. 흑흑.” 그렇게 우물은, 또는 우울은 깊어져만 간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

적막한 들에서 외롭게 떠돌던 소녀 오늘이는 이들과 만나면서 깨닫게 된다. 존재적 고독과 무의미는 자기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산다는 것이란 미약한 자기를 부여안고 한없이 흔들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뭇 생명들이 그렇게 신음하며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 여기, 우리들도! 그 존재적 고민을 풀어낼 답은 원천강에 진짜로 있었을까?

원천강이 전해주는 모든 문제의 답

오늘이는 우여곡절 끝에 원천강에 다다른다. 그곳은 만리장성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고 육중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지기가 지엄하게 막아서지만, 오늘이는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 가없는 울음의 힘이었다. 가슴에 억눌러왔던 모든 설움을 한바탕 통곡으로 풀어내자 그 간절함이 꽁꽁 닫힌 원천강 벽을 허물어뜨린 것이었다.

원천강에서 오늘이를 맞이한 것은 바로 그의 부모였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명으로 원천강 선인(仙人) 이 된 그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곧 천명(天命) 이니, 그들은 죽어서 그리로 간 것이었다. 자식을 낳자마자,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만난 부모와 자식의 이루 다 풀어낼 수 없었을 말들…… 신화는 이를 잠깐의 일처럼 서술하지만 그 장면이 전하는 무게감은 가히 측량키 어렵다.

이어지는 장면은 원천강 구경이다. 부모는 오늘이에게 원천강 높은 담장에 있는 문들을 열어 보인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들어 있었다. 시간의 원천이 되는 곳, 모든 시간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 원천강이었다. 이 세상에, 시간이 모르는 비밀이 있을까. 세상 모든 문제에 답은 실제로 거기 있었으니, 원천강 선인들은 오늘이가 길에서 만난 여러 존재들이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들려준다. 덧없는 흔들림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무기의 문제에 대한 답은 무엇이었을까? 여의주 두 개를 뱉고서 하나만 무는 것이 해법이었다 .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한 가지를 제대로 추구하기. 좀 교과서적인 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해봤다. “말하자면 그는 돈, 권력, 명예, 세 가지를 다 가지려 했던 거예요. 그러니 탈이 났지요. 답을 전해들은 그는 그 중 어떤 것 하나를 가지고 올라갔을까요 ?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사람들의 답은 ‘돈’ 이 많았거니와, 내가 이 질문에 준비해둔 답은 따로 있었다. 그 하나의 여의주는 바로 ‘자기 자신’ 이라는 것. 스스로 빛나고 가벼워질 때, 뜻대로[如意]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승천은 가능한 법이다. 지금 입안 가득 돌덩이들을 물고 있는 나.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리라.

다음, 연꽃나무에게 원천강이 전해준 답은 금지옥엽 한 송이 꽃을 뚝 꺾어서 내려놓는 일이었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고 새로운 꽃들이 가득 피어나는 법이다. 인간사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한 가지 대상이나 가치에 집착해서 그것이 세상 전부인 양 부여잡고 발버둥칠 때 다른 모든 가능성은 길을 잃는다. 지금 내가 잔뜩 매달려 있는 그 무엇이, 예컨대 성적 , 애인, 자식, 진급, 평판, 아파트 같은 것이, 떨어짐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무거운 꽃송이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을 미련없이 훌쩍 내려놓는 순간, 수많은 새로운 꽃들이 차락차락 피어날지 모른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서 별층당에서 글만 읽던 처녀 총각 매일이와 장상이에게 원천강이 전한 답은 무엇이었을까? 둘이 짝을 이루어 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만년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때 두 남녀의 결합이 의미하는 일은 무엇일까? 힘든 사람들끼리 돕고 의지하라는 것?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길이 열린다는 것? 이리저리 의미를 헤아리던 중에 두 사람의 남다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每日)과 장상(長常). 그들은 늘 글을 읽는 사람이었지만 방식은 반대였던 것 아닐까? 매일 새로운 책을 이리저리 보는 사람과 같은 책을 하염없이 읽고 또 읽는 사람 . 달리 표현하면, 눈앞의 일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과 아득히 미래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다. 나의 생각에 '매일’ 과 ‘장상’ 의 다른 이름은 ‘순간’ 과 ‘영원’ 이다. 그 둘은 서로 만나야 한다.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져야 하고 영원은 순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길은 열릴 수 있다.

매일과 장상은 서로 짝을 이룬 뒤에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 그 사연을 ‘세민황제본풀이’ 라는 민간신화에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공부가 아니었고, 책방이나 서당도 아니었다. 매일이는 술과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장상이는 짚신을 삼아서 판다. 좋은 음식 좋은 신발을 제값이 아닌 반값으로. 지불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공짜로! 그런 베풂의 일상을 ‘매일장상으로’ 하루하루 길이길이 펼쳐간 그들. 베푼 덕 (德) 이 차곡차곡 쌓여서 저승 제일의 부자가 된다. 이승이 백년이면 저승은 만년이다. 좋은 이름은 길이길이 남는다. 그렇게 그들은 삶의 영원성을 증명해낸다. 답은 구체적인 일상에 있다는 것. 자기에게 맞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것. 이 또한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임을 실감한다.

쓰다가 보니 지나쳐온 인물이 있다. 깨진 바가지를 들고 우물가에서 울던 선녀들. 그 문제는 원천강에 이르기 전에 오늘이가 스스로 해결해낸다. 댕댕이풀을 으깨서 바가지의 깨지고 구멍난 곳을 메꾸어서 말리자 물을 풀 수 있게 된다. 원래의 바가지만큼은 안 될지 몰라도 깨진 바가지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것으로 착착 물을 퍼내자 우물은 깨끗이 비워진다. 선녀들의 우울과 눈물도. 바가지가 깨졌으면 때우라는 것. 참 당연하고 뻔한 일로 생각되지만, 우울에 빠져있는 당사자들은 아득히 그 일을 하지 못한다.  "아아, 망했어. 다 틀렸다구!” 어떤가 하면 가장 틀린 일은 그렇게 손을 놓고 한탄만 하는 일이다. 틀린 곳에서 다시 한 걸음씩 다시 나아가기! 적막한 들로부터 원천강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면서 오늘이가 스스로 찾아낸 답이다. 오늘이는 그렇게 자신의 원천강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있는 곳, 적막한 들과 충만한 들 사이

오늘이가 길에서 만났던 여러 존재들은 이렇게 답을 찾는다. 그렇다면 오늘이 또한 원천강에서 자기 문제의 답을 찾았을까? 적막한 들을 왜 그리 하염없이 헤매야 했는지를. 황막한 세상 속 먼지처럼 작고 미력한 제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이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은 오늘이가 원천강을 향해 길을 가면서 이런저런 존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 갔다고 하는 것이다. 장상이와 매일이, 연꽃나무, 이무기, 선녀…… 그들 모두의 문제가 곧 오늘이 자신의 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들과 마음을 나누어 연결을 이루어 감으로써 오늘이는 존재의 고립과 무의미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이가 이무기에게 받은 여의주와 연꽃나무에게 받은 꽃송이를 들고 선녀가 됐다고 하는 신화적 진술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것만이 아니다. 앞서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장면이 전하는 측량 못할 무게감을 말했거니와, 그 장면에서 부모가 전해준 말 가운데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오늘이의 부모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할수없이 여기 있게 되었으나, 항상 네가 하는 일을 보고 있었으며 너를 보호하고 있었노라.”

오늘이는 부모 없이 늘 혼자였었다. 부모는 자기를 떠난 존재였고, 아득히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부모는 멀리 떠나갔지만, 곁에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곁에서 그가 하는 일을 보며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부모의 존재는 신화에서 한 마리의 학으로 상징화된다. 오늘이와 함께 살았다는 학은 범상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이를 깃으로 감싸주고 입에 야광주를 물려주며 보살펴주었다고 하는 그 학은 부모가 오늘이에게 남긴 사랑 또는 능력의 신화적 상징이다. 일컬어, 내 안의 부모!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 부모로부터 온 것이다. 부모는 늘 내 안에 있다. 나의 유전인자 속에. 몸과 마음 모든 곳에. 처음부터 내내. 그리고 영원히.

오늘이가 살았다는 적막한 들은 진짜로 적막한 곳이었을까? 아니, 오늘이가 그렇게 여겼을 뿐이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오늘이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그를 움직여 살리는 신령한 새가 그 곁에 있었다. 아니, 그 안에. 돌아보면 어찌 그것뿐일까. 무수한 신령한 동반자들이 가득 이어져 있다. 구름과 바람과 물과 불과 꽃과 나무…… 다람쥐와 종달새와 지렁이와 가재와 거미와 나비 …… 늘 거기 있는 하늘과 땅과 해와 달 …… 태초의 거인신 티아마트와 이미르와 타아로가와 반고가 남긴 신령한 몸 ! 그 부모의 품 안에 오늘이가 있고 또 내가 있다. 내가 지금 적막한 들이라고 느끼는 이곳 , 사실은 충만한 들이다. 에덴 동산이고 올림푸스다. 나의 닫힌 마음이, 또는 다친 마음이 그것을 황량한 광야로 만들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이가 찾아간 원천강, 그곳은 머나먼 별세계가 아니다. 우리 사는 이곳이 곧 원천강이다. 원천강에 사계절이 모여 있다고 하거니와 지금 내가 바라보는 저 창밖에도 사계절은 모여 있다. 잎을 떨군 저 나무 안에 봄과 여름, 가을이 담겨 있다. 바야흐로 원천강의 겨울 문이 열리고 있지만 머지 않아 다시 화사한 봄날로 이어질 것이다. 어김없는 필연으로. 나의 몸과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찬바람에 떨고 있는 나의 마음,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아니, 봄은 이미 내 안에 있다. 어느새 이렇게 마음에 온기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새 꽃봉오리들이 돋아나려 하지 않는가.

나 여기 이렇게 존재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아득히 잊지 않기!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갸륵한 이 생명을 오롯이 펼쳐내기! 이 세상이라는 신령한 원천강 속 하나의 아름다운 숨결이 되기!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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