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57> 인생] 인생, 연약한 인간의 쓸쓸하지만 대견한 삶의 기억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휘몰아치는 운명과 거센 역사의 파도 속에서, 나뭇잎에 매달려서라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영화는 국공내전을 거쳐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 이후의 혼란까지, 중국의 격변기를 살아낸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을 통해 모진 시대의 아우성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개인의 희망을 그려나간다.
무엇 하나 부러운 것 없는 지주의 아들 푸구이는 천성이 착하고 자상하지만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은 모른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거라 믿었던 그는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도박에 빠져 산다. 하지만 모든 것엔 종말이 있는 법. 가정이냐 도박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던 아내의 걱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푸구이는 끝내 집안의 전 재산을 도박으로 날려버린다.
남편에게 절망한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떠나버린 뒤였고,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충격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아버지의 목숨마저 앗아간다. 그제야 푸구이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두려움 앞에 망연자실한다. 신발에 흙 한 톨 묻혀본 적 없던 그는 시린 발로 장바닥에 나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연명해간다.
그래도 인생은 가끔 용기도 주고, 배려도 하는 것일까. 그가 도박을 끊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갓 낳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친정에서 돌아온다. 푸구이는 모든 걸 다 잃었지만 가장 소중한 가족이 남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보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푸구이는 기막힌 운명이나 가혹한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노름으로 집을 빼앗은 룽얼도 원망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방탕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의 탓일 뿐. 푸구이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이야기도 천연덕스럽게 지어내며 노래도 잘하는 재능을 밑천 삼아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그림자극을 공연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벌이는 내전에 휘말려 푸구이는 영문도 모른 채 군대에 끌려간다. 어느 편에 속한 것인지,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그가 바란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공산당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고 마침내 집에 돌아온 푸구이는 아내를 부둥켜안는다. 그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딸은 열병으로 벙어리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는 것,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집을 차지했던 룽얼이 지주라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에서 총살당하자 푸구이는 충격을 받는다. 만약 도박으로 집을 잃지 않았다면 처형대 위에서 날아간 건 자신의 머리가 아니었을까.
푸구이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그 무엇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낮추고 목소리를 죽여도 세파는 그를 모른 척 스쳐가지 않았다. 대약진운동이 과열되며 마을마다 집집마다 쇠붙이란 쇠붙이는 전부 수거해가던 시절, 푸구이는 철 생산 작업에 동원된 아들을 사고로 잃는다.
하루라도 빠지면 반동분자로 몰릴까봐 두려웠던 그가 벌써 며칠, 밤마다 노동에 동원된 탓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쓰러져 잠든 어린 아들을 들쳐 업고 작업장에 데려다준 날이었다. 그날 하루만이라도 아이를 자게 내버려뒀더라면! 푸구이는 가슴을 치고 후회하지만 죽은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푸구이는 또 살아간다. 거리와 건물들은 물론 집안 구석구석이 마오의 붉은 초상화와 어록으로 도배되고 세상은 온통 홍위병 천하였다. 모든 지식과 예술과 자본이 악으로 규정되고 죄가 되었기에 푸구이 또한 더 이상 그림자극을 할 수도, 소품조차 갖고 있을 수도 없게 된다.
그래도 딸 펑샤가 건실한 청년과 결혼해서 임신했다는 소식에 잠시 기뻐하지만, 지식인들을 모두 반동으로 몰아 잡아 가두고 죽여 버린 문화대혁명의 피바람은 푸구이 앞에도 모질게 불어닥친다. 펑샤가 아기를 낳고 급작스러운 하혈로 죽은 것이다. 병원에는 풋내기 학생들뿐,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삶은 잔인하다. 자식도, 일도, 꿈과 행복도 모두 빼앗아놓고 계속 살아가라 한다. 남은 희망이 없는데 무엇으로 살아가나, 물어도 삶의 수레바퀴는 대답 없이 돌고 돈다.
“병아리는 거위가 되고 거위는 양이 되고 양은 또 소가 되지. 그러면 공산주의 사회가 완성되고 매일 만두와 고기를 먹을 수 있어. 그리고 너는 부자가 돼서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다닐 거야.”
부부는 어느덧 황혼에 접어들고 핏빛 역사의 소용돌이도 가라앉을 즈음, 푸구이는 딸이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 어린 손자의 미래를 꿈꾼다. 오래전 아들이 죽던 날, 등에 업고 작업장에 데려다주며 함께 나누었던 행복의 꿈을 손자에게 대물림하는 장면이다.
장이머우 감독의 중국 영화로 ‘위화(余華)’의 소설이 원작이다. 원제 ‘활착(活着)’은 ‘접목하거나 옮겨 심은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사는 것’을 뜻한다. 영화에서는 아내 역을 맡은 공리(巩俐)의 비중이 작지 않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푸구이이며, 영화에서도 그 역을 맡은 거요우(葛优)의 연기가 돋보인다. 감추고 싶은 중국 현대사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낸 탓에 개봉이 금지되고 감독과 두 배우에게 활동 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거요우가 1994년,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중국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탄 덕에 제재가 모두 풀렸다고 한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의 끝없는 연속이라 해도 인간은 또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렇게 먼 길을 걷다 돌아보면 빈손, 그래도 덤덤히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고, 타인에게는 쉽게 듣고 쉽게 잊을 한 편의 옛날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조차 쓸쓸하게나마 웃으며 회상할 수 있게 된 것일 뿐, 굽이굽이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길을 걸어온 인생의 주인공에게는 매 순간순간, 어찌 대견하고 장대한 삶의 서사가 아니었겠는가.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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