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콘텐츠' 시대, 5시간 17분짜리 영화가 주는 행복의 시간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틱톡이 전 세계를 휩쓸고 유튜브에선 드라마 요약 영상이 흥하는 '숏폼 콘텐츠'의 시대다.
문화를 향유하는 데 들이는 시간만큼이나 인내심도 없어진 이때 러닝타임이 무려 317분에 달하는 영화가 우리나라 관객을 찾는다. 일본에서 '젊은 거장'으로 통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 아워'다.
5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때문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작품은 2015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후보로 지명된 데 이어 수상도 했고 약 6년 후 한국 극장에 걸리게 됐다.
'해피 아워'는 '타이타닉'(194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63분), '아이리시맨'(209분) 등 긴 러닝타임으로 유명한 다른 영화와는 내용 면에서 차이가 크다. 평범한 여성 4명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이들이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현대 상업영화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도전이다.
주인공은 일본 고베에 사는 30대 후반의 네 친구 준(가와무라 리라), 아카리(다나카 사치에), 사쿠라코(기쿠치 하즈키), 후미(미하라 마이코)다. 준을 제외하면 넷은 철이 다 든 서른 살이 돼서야 만났다. 그러나 수 십년지기 못지않게 서로의 모든 것을 알 만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들은 겉으로는 어엿한 직장과 가정이 있는 중산층이지만, 각자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친구들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행복한 척 살아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넷은 워크숍에 참여해 서로 등을 기대고 일어서기, 머리를 맞대고 생각 읽기, 상대의 단전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기 등 여러 종류의 게임을 하게 된다. 이 장면만 30분이 넘는다.
자기 자신보다 '너'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이 마법을 일으킨 것일까. 준은 워크숍 뒤풀이에서 침묵을 깨고 깜짝 고백한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버티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됐으며 현재 이혼 재판 중이라는 것. 준은 친구들이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겠지만, 남편의 외도로 이혼의 아픔을 겪은 아카리는 준을 비난한다.
반면 사쿠라코와 후미는 자신들의 결혼생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는다. 폭풍 같은 심경의 변화를 맞은 네 여자는 자기 인생을 반추하는 한편 일탈도 해보고, 결국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영화는 네 사람의 서사를 고루 조명한다. 가정과 일터, 생각, 고민, 연애관, 사랑 등을 파고들어 이들이 행복을 좇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가 끝나면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다. 긴 러닝타임 때문도 있겠지만 주인공들을 오롯이 조명하고자 하는 감독의 집요함 덕분이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벌어지는 언쟁 또한 숨이 막힐 정도로 생생하다.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누군가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을 내뱉고 이어 반박, 논쟁 그리고 마지막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한 신에 담았다. 이런 과정에서 주옥같은 대사가 수없이 나오는데, 귀를 기울여야만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다.
연기 경력이 전무한 네 사람의 호연도 빛난다. 류스케 감독은 고베 지역에서 즉흥 연기 워크숍을 열어 이들을 캐스팅했다. 그해 열린 제68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는 등 찬사를 받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감상 전에 들었던 궁금증이 풀릴 것 같다. 6부작 드라마로 만들지, 왜 영화여야 했을까. 그 답은 5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네 여자를 봐야만 이들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일상을 채운 공허를 만져보고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거물 마피아의 일대기도 아니고, 거대한 스케일의 블록버스터도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여자 네 명의 서사가 담긴 이 영화를 5시간짜리로 내놓은 류스케 감독의 용기는 박수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12월 9일 개봉.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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