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없이 떠난 전두환, 아직도 사과 없는 언론

미디어오늘 2021. 11. 30. 09:1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전두환이 사망했다.

언론이 전두환씨, 전두환 전직 대통령, 학살자 전두환 등 그의 호칭을 혼재해 부르는 것을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일부 언론이 전직 대통령으로 명기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방기하는 행위와 다름없어 무책임하다.

전두환 죽음에 언론은 '사과 없이 떠났다'라고 한목소리로 개탄했지만 정작 5·18과 전두환 정권 당시 부역 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은 없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오 사설] 미디어오늘 1328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전두환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부쳐 과오를 정확히 지적해 후대에 남기는 게 언론의 역할일 것이다. 특히 그의 호칭은 역사적 평가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언론이 전두환씨, 전두환 전직 대통령, 학살자 전두환 등 그의 호칭을 혼재해 부르는 것을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전두환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돼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받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자격이 박탈됐다는 점에서 전두환씨라고 부르는 게 응당하다.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만 내세워 전직 대통령이라고 부르면 독재자 혹은 학살자 전두환이라는 역사적 진실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일부 언론이 전직 대통령으로 명기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방기하는 행위와 다름없어 무책임하다.

▲ 사진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 연합뉴스

지난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을 당시 언론은 전두환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두환 호칭이 다시금 주목받은 때는 지난 2019년이다. 전두환은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돼 광주 법원에 출두하기로 돼 있었다. 지상파 3사는 리포팅에서 전두환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리포트 제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표기했지만 본문 리포팅에서 전씨라는 호칭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전직 대통령 표기는 신문에서 두드러졌다.

그리고 전두환 죽음에 이르러 그의 호칭은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전두환 사망을 처음 타진한 연합뉴스는 '[1보]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일간지 표기를 보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제외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표기했다. 사망 대신 별세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동아일보는 속보에서 전직 대통령으로 표기했지만 1면 머리기사에서 “전두환, 5·18 사과 없이 사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우리 사회가 고인에게 관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전두환 과오에 무게를 둔 호칭 사용이 많았다는 점은 눈여겨볼 지점이다.

▲ 11월24일 조선일보 1면

언론의 전두환 호칭 표기와 더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전두환 죽음에 언론은 '사과 없이 떠났다'라고 한목소리로 개탄했지만 정작 5·18과 전두환 정권 당시 부역 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은 없었다. '전두환 정권 폭압에 언론 통제가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과거 부역 행위에 언론도 사과 입장을 밝혀야 한다'라는 댓글은 뼈아프다. 대규모 해직 사태를 겪는 등 전두환 정권 아래 언론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1980년대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장군의 전기(傳記)로 전락했던 여러 신문의 기획 기사 시리즈는 지금도 회자되는 언론의 흑역사다. 사망한 사람만 300명이 넘고 부상자만 수천 명에 이른 삼청교육대는 인권유린의 대표적 현장이었지만 언론은 “땀을 배우는 인간 교육장”(조선일보)이라고 치켜세우기 바빴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자 '혁명을 위해 성마저 혁명 도구화한다'는 정부 당국 발표를 받아 사건을 은폐했다.

물론 전두환 정권에서 언론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6년 보도지침 사건이 대표적이다. 저항 언론인들은 정부 기관원들이 각 언론사에 상주해 보도에 간섭하고 기자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용기 있게 폭로했다. 정권을 향한 적극적 구애 행위,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부역했던 행위, 그리고 저항했던 행위를 구분해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자기 반성문을 쓰자. 역사의 기록은 성찰 위에서 힘을 갖는다.

[미디어오늘 바로가기][미디어오늘 페이스북]
미디어오늘을 지지·격려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Copyrights ⓒ 미디어오늘.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