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여자 연애 이야기 조심스러워 할 필요 있나요?"

라제기 2021. 11.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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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빠진 로맨스'의 정가영 감독
정가영 감독은 만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가져갈 것 3개를 묻자 망설임 없이 "책과 남자, 술"이라고 대답했다. CJ ENM 제공

노골적이다. 남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잡지사 기자인 남자는 박우리(손석구)다. 유튜브 콘텐츠를 만드는 여자는 함자영(전종서)이다. 두 사람은 데이팅 앱 ‘오작교미’를 통해 인연을 맺는다. 남자는 섹스칼럼을 쓰기 위한 직업적인 목표에서, 여자는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즉석 만남에 나선다. 두 사람은 부담 없이 육체적 관계를 즐긴다. 목표가 명확하니 나누는 대화는 직구다. 에두르지 않아 오히려 달콤하다. 24일 개봉한 ‘연애 빠진 로맨스’는 성을 둘러싼 말맛이 두드러진 이색 로맨틱코미디다. 각본과 연출을 겸한 정가영(31) 감독을 최근 화상으로 만나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 감독은 독립영화계 유명인사다. 인상적인 소재를 다룬 인상적인 단편영화를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받았다.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첫 영화는 10분짜리 ‘혀의 미래’(2014)였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화다. 놀이터에서 첫 키스를 하려는 남녀의 사연을 그렸다.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혀의 미래’가 뒤틀리게 되는 내용을 담았다. ‘내가 어때섷ㅎㅎ’(2015) 같이 재기 발랄하면서도 솔직 담백한 내용의 단편들을 선보이다가 장편영화 ‘비치온더비치’(2016)와 ‘밤치기’(2018), ‘하트’(2020)를 만들었다. 정 감독은 ‘밤치기’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 비전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정 감독의 첫 상업영화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주인공 박우리(왼쪽)와 함자영은 데이팅 앱으로 만나 내숭 없이 대화를 나눈다. 솔직담백한 관계가 젊은 세대의 문화를 반영한다. CJ ENM 제공

정 감독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은 솔직함을 넘어 도발적이다.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관계를 먼저 요구하거나(‘비치온더비치’), 성행위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해 두 번째 만난 남자를 당황하게 하거나(‘밤치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자신이랑 잔 남자는 모두 인생 낙오자가 됐는데 괜찮냐고 묻는다(‘극장 미림’). ‘연애 빠진 로맨스’의 자영 역시 마찬가지다. “백마 탄 왕자인데 XX가 작으면” 같은 말을 망설임 없이 한다. 정 감독은 “여자들의 연애 이야기, 성 이야기도 재미있는 게 아주 많은데 사회 분위기가 조심스러워 답답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좀 유쾌하게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다”고 덧붙였다.

정 감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 영화 ‘러브레터’(1995)를 본 후 영화에 빠져들었다. “‘출발비디오 여행’ 같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 PD가 될” 요량으로 한 대학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언론인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대학을 그만두고,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갔다. 그마저도 곧 그만뒀다. “단계별로 학습하는 과정을 밟기보다 당장 눈앞에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였다. “대학 두 군데를 때려치우고 불안했던 마음에 뭔가를 돌파한다는 느낌으로 강박적으로 작품을 만들면서 살았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스태프를 최소화하고,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는 모두 주연(‘연애 빠진 로맨스’ 제외)으로 출연했다. 서른에 막 접어든, 이른 나이에 그가 장편영화만 4편을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다.

'비치온더비치' 속 여자는 다짜고짜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잠자리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정가영 감독 영화 속 여자들은 욕망 앞에서 당당하다. 비치사 제공

정 감독의 영화들은 매번 사랑을 다룬다. 취업문제나 주거문제 등 사회 이슈가 그의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정 감독은 “어려서부터 연애 감정을 알고 싶어하고 관찰하고 싶은 이상한 집착이 있었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어떤 재미가 있기에 그런 거지라는 호기심이 있어요.”

남녀의 솔직한 관계를 그려 와서일까. 정 감독에게 종종 붙는 수식은 ‘여자 홍상수’. 정 감독은 ‘홍 감독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맥주를 마시며 9시 뉴스 보듯 홍 감독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면 기분이 좋다”고도 말했다.

정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는 조인성이다. 조인성을 보고 싶다는 사심에 그를 캐스팅하겠다며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2017)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정 감독은 “중년 남녀가 좀 수수하게, 자연스럽게 만나는 이야기를 설경구, 전도연을 통해 그려보고 싶은 작은 희망이 있다”고 했다. 두 대배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사랑 이야기. “중년이어도 마음의 나이는 안 늙는 것 같거든요.”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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