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문준용 "비싼 장비대여 탓에 짧은 전시 아쉬워..큰 도전 됐다"
꾸준히 탐구한 '그림자 증강현실' 연작
독보적 기술에 스토리 입힌 미디어아트
논란됐던 문화예술위 지원금으로 작업
제작비 한참 넘겨..장비대여만 4천만원
"최신·최고 보여준 것이란 자신감 생겨"
[파주=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한산하고 외로운 ‘그림자’들만 스치고 있을 거란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얘기다. 전시장은 북적이고 있었다. 들어서는 이들은 기대감에, 나서는 이들은 만족감에 웅성거리는 분위기 역시 우울한 추측을 완전히 벗겨 버렸다. 검은 암막 커튼을 젖히고 들어서자 30~40명쯤 되는 관람객 틈으로 삐죽해 보이는 ‘키’가 보였다. 그 사이를 바삐 오가며 작품설명에 여념이 없는 한 사람, 작가 문준용(39)이었다.
스산한 금요일 늦은 오후, 경기 파주 문발동 스튜디오끼를 찾았다. 파주출판단지 끝부분에 자리한 이 공간에서 문 작가는 개인전 ‘어그먼티드 섀도’(Augmented Shadow·증강그림자)를 열었다. 이른바 ‘그림자 증강현실’ 연작. 작가가 끊임없이 보태고 다듬으며 매번 진화하는 기술에 태운 그림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미디어아트다. 이번에는 한 발 더 내밀었다. 그들의 몸에 그들의 스토리를 입혀낸 거다. 그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전부던 그림자들이 이제야 제 사연을 풀어냈다고 할까. 덕분에 그럴듯한 타이틀도 달렸다. ‘별을 쫓는 그림자들’(2021)이라고. 이는 전시의 부제면서 그대로 작품명이 됐다.
그 ‘별을 쫓는 그림자들’을 이끈 문 작가를 다시 만났다. 사실 전시장의 변화만큼이나 당황스러운 변화는 하나 더 있었다.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편안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싸움닭 문준용’이 사라진 거다. 관람객을 대하는 태도며 목소리에선 여유까지 피어나오는데. 게다가 눈빛까지 반짝인다. 내 일에 푹 빠진 사람만이 쏠 수 있는 그 레이저 눈빛. 짐짓 외면하며 “자꾸 봐 정들겠다”로 말문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 작가와의 인터뷰는 이번이 세 번째다. 그것도 아버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중에만. 전시하는 작가를 찾아가는 일이야 이상할 게 하나 없는데,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번번이 참 험난했더랬다.
지난해 논란된 ‘한국문화예술위 문예진흥기금’으로 제작
사람과 인터랙션(interaction·상호작용)하는 15분짜리 미디어아트 작품. 큐 사인은 역시 사람이 줘야 했다. 누군가 컵처럼 생긴 손전등을 들면서. 그 안에 든 빛덩이를, 눈을 깜박이며 전시장 벽면에 기댄 6개의 그림자 중 하나에게 던져주면 그림자들의 ‘무빙’이 시작되는데. 심장으로 받은 빛을 작대기 끝에 올려 바닥에서 물고기를 낚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물속으로 장면이 바뀐다. 바닥과 벽을 타고 노란 물고기떼와 그림자들이 부유하듯 춤을 추는 거다. 이후 다시 어두워진 배경에 작대기 빛은 마치 노련한 장비인 양 창을 내고 문을 내더니 밤하늘로 향한다. 별을 따서 세상을 비추는 거다.
“눈을 속이는 착시미술이고 공간을 차단한 몰입예술이다. 컵을 든 한 사람이 이야기를 진행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감상할 수 있다. 그림자에 빛을 던져주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그림이 바뀐다.” 누군가 나서 교감을 주도해야 하는 인터랙션은 문 작가 작업에서 핵심이다. 그 동반자인 ‘그림자’와는 10년지기가 됐다. 이번 작업에 유독 신경을 쓴 건 평면을 넘어 ‘입체’를 넘보는 새로운 그림자의 출현. 왜 굳이 입체여야 했을까. “평면이 입체가 됐다는 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니까.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되고 기적이 만들어지는 장면을 직접 펼쳐 보여야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진행해야 할 과정이었고, 복잡하게 말하면 이겨내야 할 오기였다. 지난해 12월 난리북새통을 치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을 기억한다면. 맞다. 이번 작품은 그 6900만원으로 제작한 거다. ‘코로나19 지원금까지 낚아챈 대통령 아들’이란 오해·오명에 그는 심하게 시달렸다. 그러니 ‘나도 작가’란 걸 내보여야 했을 테고, 그 고충을 굳이 말로 해야 알 건가.
“제작비는 6900만원을 한참 넘겼다. 장비 대여에만 4000만원 남짓 들었다. 컴퓨터그래픽팀, 모델링, 애니메이션 제작 등에 투입된 전문가가 10여명은 된다. 오히려 장소대관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장이 높아야 하는 조건을 맞출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았을 뿐.”
“생명 되고 기적 만들어지는 것 펼쳐 보여야 했다”
5m쯤 되는 층고에, 7∼10m쯤 되는 사각공간의 3면을 전시장으로 쓴 ‘별을 쫓는 그림자들’은 실제 곳곳에 올리고 붙인 5대의 프로젝터를 동시에 돌릴 만큼 정교하고 ‘비싼’ 작업이다. 눈을 미혹하는 화려한 영상 그 이상의 가량은 역시 ‘기술’에 있었다. 착시를 만드는 ‘아나모픽 기법’이 핵심이다. 일찍이 특허(‘증강현실에서 움직이는 광원의 위치를 반영하여 영상을 처리하는 방법 및 장치’)까지 받아둔 이 기술에 한해선 문 작가가 독보적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방이 있었으니 ‘스토리’다.
“이야기라는 게 따로 놀아선 안 된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엮여야 한다. 이야기의 일부가 돼야 진짜 기술이 되는 거다.” 그래서 문 작가가 “큰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지점은 따로 생겼다. 바로 그 이야기를 짜는 과정인데. “15분 분량에 이야기를 입히는 일은 이번이 첫 시도인데 내가 스토리 작가는 아니라서 괜찮은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로라할 미디어아티스트를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이 엉뚱하게 ‘이야기 짜기’였단 소리다. 그게 그리 중요했을까. “미디어아트를 미술관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확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임도 만들고 동화책도 만들고. 이번 기회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그 서사 작업 덕분에 대중적인 공감대도 넓어졌다. 눈만 희번덕하던 날카로운 예전 그림자들과는 달리 둥글고 귀엽고 유연한 그림자들이 꿈을 찾아간다는 따뜻함까지 품지 않았나. 결국 이 모든 요소들 덕에 ‘별을 쫓는 그림자들’은 문 작가의 역작이 됐다. 달리 역작이 아니다. 작가를 편안하게 놔주고 관람객을 빠져들게 한, 그토록 원하던 소통을 이뤘다는 소리다.
실제 관람객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아이를 동반한 40대 중반의 한 여성은 “사실 우리나 아이들이 접하는 영상예술이라고 해봐야 유튜브에서 보는 게 전부일 텐데, 지금 세상에 딱 맞는 고퀄러티 전시라고 할 만하다”며 “특히 스토리가 마음을 적셨다”고 감동을 전했다. 전시를 지켜본 미술계 관계자의 평도 호의적이다. “미디어아트는 회화작가도 접목을 할 만큼 현대미술 최전방에 있다. 하지만 맹점은 차갑고 또 난해하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관람자가 작품에 들어가 관계를 맺어야 완성되는 문 작가의 작업은 대단한 친밀감을 준다.” 전문가적 조언도 기꺼이 보탰다. “스토리가 좀더 단단해지면 작품에 파워가 생기겠다 싶다. 한국적인 것이든 휴머니티든 서사의 뿌리를 잡는 일이 필요하다.”
인터뷰는 그리 원활하지 못했다. 작가에게 감상을 털어놓는, 사진 한 장 찍자는 요청들이 쇄도해서다. 지난해 개인전, 쫓기듯 전시장을 오가던 때를 떠올리면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금산갤러리 전시는 내 작업의 미니어처 개념이었다. 당시 상황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최상을 내보이지 못한 점에서도 당당할 수 없었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최신 최고를 보여주는 것이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내친김에 물었다. 내년 대선 이후에는 평범한 작가로 돌아갈 수 있겠나.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이 나왔다. “모르겠다, 정말로. 한편 궁금하기도 하다.”
전시는 29일에 막을 내렸다. 열흘 남짓한 짧은 전시가 아쉽다고 하자 “장비 대여료가 비싼 탓에 오래 할 수가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막판으로 갈수록 몰리던 관람객은 금요일 300명, 주말에는 1000여명에 달했다고 전시장 관계자가 귀띔했다.
세 번째 만남.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이젠 굳이 그 이름 앞에 ‘대통령의 아들’이란 수식을 달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 피천득은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거다”라고 썼더랬다. 그 묵직한 ‘세 번째’의 부담은 문 작가가 직접 덜어내줬다. 만나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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