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05] 사라지고 없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1. 11. 3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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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기념비, 1987년, 금속 프레임과 전구, 180x108㎝, 작가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어두운 전시실에 흐릿한 흑백 인물 사진이 마치 촛불처럼 노란빛을 발하는 전구에 둘러싸여 황동색 틀 안에 들어있다. 제단이나 영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프랑스 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Liberté Boltanski·1944~2021)의 ‘기념비’ 연작 중 하나다. ‘기념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추도하기 위한 위령비 같은 작품이다.

볼탕스키는 1944년 나치로부터 파리가 해방된 직후에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숨어 살던 부모는 그의 중간 이름을 ‘자유’라고 지었다. 만약 태어나는 날까지 해방되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어딘가에 숨겨져 울음소리도 틀어막은 채 살아야 했을지 모른다. 생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가족과 친구, 지인들의 죽음을 헤아리며 자라 미술가가 된 볼탕스키는 그가 본 적도 없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이들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가 오직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만을 애도했던 건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엄청난 역사적 참극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볼탕스키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을 두고 역사적 사건이거나 사소한 일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볼탕스키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준비하다 지난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에서 숫자 4가 죽음을 뜻하는 데다,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눈다면 자기는 마지막인 네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전시 제목을 ‘4.4′라고 하자고 고집했다. 오랜 세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해 온 작가는 자기 생의 마지막을 예견했던 것 같다. 이제 애도는 남은 이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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