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 당일 4500석 전석 매진.. 인간의 위선·위악을 고발하다
퓰리처상·토니상 받은 美 수작
인종·종교 등 다층적으로 담아
정경호는 데뷔 무대서도 빛나
국립극단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연출 신유청)가 지난 26일 개막했다. 미국 극작가 토니 쿠슈너에게 퓰리처상과 토니상 등을 안긴 수작. 장장 8시간에 이르는 마라톤 연극이다. 올해는 1부(4시간)만 공연하고 내년 2월에 2부(4시간)를 올린다. 동성애 장면 때문에 미성년자 관람 불가다. 문턱이 높은 연극을 누가 보러 올까 하는 근심은 기우였다. 모두 4500석이 발매 당일 매진됐다.
1985년 미국 뉴욕.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루이스(김세환)는 동성 연인 프라이어(정경호)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비보를 접한다. 한편 법무관으로 일하는 조(정환)는 ‘악마의 변호사’ 로이 콘(박지일)에게 워싱턴DC 법무부 일을 제안받지만 아내 하퍼(김보나)를 설득하기 어렵다. 병세가 나빠지는 연인 모습에 겁이 난 루이스는 프라이어를 떠나고, 환청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프라이어 앞에 나타난다.
무대는 온실을 닮았다. 그 세계 안에는 식물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바이러스나 작은 상처에도 취약하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동성애, 에이즈, 정치, 인종, 종교 등 미국 사회를 다층적으로 담아냈다. 대서양을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한 조상의 후예들이 세기말에 경험하는 불안과 공포를 포착했다. 구멍이 뚫리고 위기에 처한다. 그 바람에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연극은 묵시적이다. 신이 누군가를 통해 메시지를 들려준다는 뜻이다. ‘그을린 사랑’ ‘빈센트 리버’ 등으로 기억되는 연출가 신유청은 “성서라는 턴테이블 위에 1980년대의 미국 상황, ‘엔젤스 인 아메라카’라는 LP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그 연주를 듣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심리적 비상사태에 처한 인물들이 토해내는 신음과 비명, 위선과 위악을 만날 수 있다.
회전 무대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장면을 바꾼다. 관객의 예상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루이스와 조가 처음 만나는 화장실 장면은 조명으로 공간을 빚어냈다. 분홍색 가운을 입고 눈 화장과 긴 속눈썹을 붙인 프라이어가 거울을 앞에 두고 하퍼와 섞이는 대목도 강렬했다. 완전히 다른 두 공간이 겹쳐지고 틈입하게 하는 연출도 훌륭했다. 공원에서 벌어지는 동성애 행위는 좀 적나라하면서도 웃겼다. 다행히 이물감이 작았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남의 공간을 이렇게 정교하게 점유하는 연극은 오랜만이다. 프라이어와 루이스, 조와 하퍼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폭발하는 장면은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병원과 집, 안과 밖, 말과 마음이 연결돼 있었다. 누구나 결국은 혼자 죽는다. 오래 억눌린 주인공들이 감정과 진실을 분출하는 이 대목에서 관객도 큰 진동을 느낄 것이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초연 당시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대담하면서 가장 위험한 동성애 연극”이라고 썼다. 30년 뒤에 상륙한 한국 초연은 거대한 서사를 분석하며 관객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노련한 배우 박지일·전국향이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줬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정경호는 데뷔작인 이 연극에서도 빛이 났다. 김세환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웠다. 공연은 12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벌써 2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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