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부흥' 이끈 창왕의 리더십[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21. 11. 30. 03:03
사비기(538∼660) 백제왕들 가운데 성왕, 무왕, 의자왕은 잘 알려져 있다. 성왕은 영웅군주로, 무왕은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로, 의자왕은 백제를 패망으로 이끈 인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창왕(위덕왕), 혜왕, 법왕은 생소하다. 혜왕과 법왕은 재위기간이 워낙 짧아 그렇다 하더라도 창왕은 오랜 재위기간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런데 1995년 이래 창왕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해 10월 충남 부여 능산리 한 절터에서 ‘백제 창왕’이란 이름이 새겨진 석조사리감이 발굴된 데 이어 2007년 9월 부여 왕흥사지에서 ‘백제왕 창’이라는 표현이 새겨진 청동사리함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 발굴들을 통해 그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창왕이 학계에서 중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는 어떤 인물이고, 또 그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44년 재위, 은둔의 리더십
창왕은 554년 7월 왕위에 올라 598년 12월까지 무려 44년 5개월간 왕위에 있었다. 이는 4세기 이후의 백제왕들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한 ‘역대급’ 기록이다. 물론 그가 장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선대 왕들이 줄줄이 비명횡사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치세를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편을 보면, 그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중국 여러 나라와 통교했다는 기록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야 여러 나라가 차례로 신라에 병합당하고 신라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업적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가 이처럼 은둔의 리더십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젊은 시절 그의 패기가 빚은 참극에 기인한다. 때는 5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자 신분이었던 창왕 여창(餘昌)은 부왕인 성왕을 대신해 전장을 누볐고,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겨 숙원을 풀었으나 신라를 끌어들인 점이 불씨로 남았다.
○ ‘관산성 비극’의 주역
한강 상류 요충지를 장악한 신라가 2년 후 한강 하류의 백제 땅으로 진출했다. 믿었던 우방에게 발등을 찍히자 성왕은 분노했다. 대신들이 전쟁에 반대하자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라며 반대를 물리치고 대군을 몰아 충북 옥천의 관산성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태자가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신라군에 사로잡혀 참수됐고,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의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혀 뭇사람에게 밟히는 치욕을 당했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최고위 관등인 좌평 4명과 3만 명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관산성에서의 패전은 백제로선 뼈아팠다. 강국으로 도약하려던 백제의 꿈이 수포가 됐기에 이 전투를 ‘관산성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다. 이후 신라와 백제 사이의 균형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창은 부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랫동안 은둔의 세월을 보냈으며 불법(佛法)에 의지해 정치를 펼쳤다.
‘창왕’명 사리감이 발굴된 능산리의 사찰 역시 그의 정치적 무대였을 것이다. 그의 누이가 567년에 사리를 공양했다고 하나 사찰을 만들 때 왕이 깊숙이 관여했을 공산이 크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이 절터의 목탑 터를 발굴해 큰 성과를 냈지만 발굴하기 오래전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 1430년 만에 개봉된 ‘타임캡슐’
그러나 그 아쉬움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해소됐다. 완벽하게 보존된 사리기와 공양품이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지의 성격을 밝히고자 2000년부터 연차 발굴에 착수했다. 8차 발굴에서 목탑 터 하부를 조사하다 널찍한 초석을 발견했는데, 그 한쪽에 자그마한 뚜껑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사원들은 그 아래에 중요한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주의를 기울였다. 조심스레 뚜껑돌을 들어올리니 예상이 적중했다. 입방체 모양의 공간에 청동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습해 뚜껑을 여니 그 안에 다시 뚜껑을 갖춘 은제사리호가 들어 있었고 그 뚜껑을 여니 다시 더 작은 금제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조사원들은 그 속에 불(佛)사리가 모셔져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연구실로 옮겨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지만 예상과 달리 사리는 없었다.
청동제사리합의 표면에 “정유년인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이 세상을 뜬 왕자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본디 사리가 2매였는데 묻으려 하니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기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목탑의 기둥받침돌인 심초석 주변에선 사리봉영의식을 거행하는 날 참석자들이 공양한 귀중품 1만여 점이 고스란히 발견됐다. 고위 관료의 전유물이던 관과 허리띠 부품을 비롯해 화려한 장신구류, 금실 무더기, 중국에서 들여온 동전과 옥제 장식품 등 다양했다. 왕자의 명복과 국가의 안녕을 빌며 묻은 타임캡슐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개봉된 것이다.
두 차례의 발굴에서 창왕과 그 시대에 대한 중요 자료가 드러났다. 창왕이 왕도 여러 곳에 절을 짓고 망자들의 영혼을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정치 무대로 활용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왕흥사지 목탑 터에서 발견된 유물은 무령왕릉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언제, 누가, 왜 묻은 것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그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 사비기 백제 사회와 문화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장차 그에 대한 연구가 정치해져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창왕과 그의 시대에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길 기대한다.
그런데 1995년 이래 창왕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해 10월 충남 부여 능산리 한 절터에서 ‘백제 창왕’이란 이름이 새겨진 석조사리감이 발굴된 데 이어 2007년 9월 부여 왕흥사지에서 ‘백제왕 창’이라는 표현이 새겨진 청동사리함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 발굴들을 통해 그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창왕이 학계에서 중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는 어떤 인물이고, 또 그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44년 재위, 은둔의 리더십
창왕은 554년 7월 왕위에 올라 598년 12월까지 무려 44년 5개월간 왕위에 있었다. 이는 4세기 이후의 백제왕들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한 ‘역대급’ 기록이다. 물론 그가 장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선대 왕들이 줄줄이 비명횡사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치세를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편을 보면, 그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중국 여러 나라와 통교했다는 기록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야 여러 나라가 차례로 신라에 병합당하고 신라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업적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가 이처럼 은둔의 리더십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젊은 시절 그의 패기가 빚은 참극에 기인한다. 때는 5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자 신분이었던 창왕 여창(餘昌)은 부왕인 성왕을 대신해 전장을 누볐고,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겨 숙원을 풀었으나 신라를 끌어들인 점이 불씨로 남았다.
○ ‘관산성 비극’의 주역
한강 상류 요충지를 장악한 신라가 2년 후 한강 하류의 백제 땅으로 진출했다. 믿었던 우방에게 발등을 찍히자 성왕은 분노했다. 대신들이 전쟁에 반대하자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라며 반대를 물리치고 대군을 몰아 충북 옥천의 관산성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태자가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신라군에 사로잡혀 참수됐고,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의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혀 뭇사람에게 밟히는 치욕을 당했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최고위 관등인 좌평 4명과 3만 명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관산성에서의 패전은 백제로선 뼈아팠다. 강국으로 도약하려던 백제의 꿈이 수포가 됐기에 이 전투를 ‘관산성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다. 이후 신라와 백제 사이의 균형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창은 부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랫동안 은둔의 세월을 보냈으며 불법(佛法)에 의지해 정치를 펼쳤다.
‘창왕’명 사리감이 발굴된 능산리의 사찰 역시 그의 정치적 무대였을 것이다. 그의 누이가 567년에 사리를 공양했다고 하나 사찰을 만들 때 왕이 깊숙이 관여했을 공산이 크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이 절터의 목탑 터를 발굴해 큰 성과를 냈지만 발굴하기 오래전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 1430년 만에 개봉된 ‘타임캡슐’
그러나 그 아쉬움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해소됐다. 완벽하게 보존된 사리기와 공양품이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지의 성격을 밝히고자 2000년부터 연차 발굴에 착수했다. 8차 발굴에서 목탑 터 하부를 조사하다 널찍한 초석을 발견했는데, 그 한쪽에 자그마한 뚜껑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사원들은 그 아래에 중요한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주의를 기울였다. 조심스레 뚜껑돌을 들어올리니 예상이 적중했다. 입방체 모양의 공간에 청동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습해 뚜껑을 여니 그 안에 다시 뚜껑을 갖춘 은제사리호가 들어 있었고 그 뚜껑을 여니 다시 더 작은 금제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조사원들은 그 속에 불(佛)사리가 모셔져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연구실로 옮겨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지만 예상과 달리 사리는 없었다.
청동제사리합의 표면에 “정유년인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이 세상을 뜬 왕자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본디 사리가 2매였는데 묻으려 하니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기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목탑의 기둥받침돌인 심초석 주변에선 사리봉영의식을 거행하는 날 참석자들이 공양한 귀중품 1만여 점이 고스란히 발견됐다. 고위 관료의 전유물이던 관과 허리띠 부품을 비롯해 화려한 장신구류, 금실 무더기, 중국에서 들여온 동전과 옥제 장식품 등 다양했다. 왕자의 명복과 국가의 안녕을 빌며 묻은 타임캡슐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개봉된 것이다.
두 차례의 발굴에서 창왕과 그 시대에 대한 중요 자료가 드러났다. 창왕이 왕도 여러 곳에 절을 짓고 망자들의 영혼을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정치 무대로 활용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왕흥사지 목탑 터에서 발견된 유물은 무령왕릉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언제, 누가, 왜 묻은 것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그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 사비기 백제 사회와 문화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장차 그에 대한 연구가 정치해져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창왕과 그의 시대에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길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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