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고통의 개인화와 공통감각의 상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2021. 11. 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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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래전에 빨치산 세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과 전쟁, 노골적인 폭력의 시대에 관해 말했다. 무용담과 고통이 뒤섞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삶에 나를 투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시대를 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우리 시대라고 딱히 삶이 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우리 세대는 의문사와 분신의 시대를 살았다. 국가폭력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뒤쫓고 생명을 위협했다. 길을 가다가, 말을 꺼내다가 주위를 살피는 시대였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노태우, 전두환이 그런 폭력과 희생의 시대를 지배했던 자들이다.

누군가에게는 치떨리는 이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과거의 이름이다.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빨치산 세대를 보며 느낀 감정과 비슷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 시대의 고통이 가장 먼저 느껴지고, 그 고통의 무게는 개인이 감당하지만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제 국가폭력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반응하는 고통은 다양해졌다. 어느 것엔 민감하고 어느 것엔 둔감하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에서 자연스러웠던 관행들이나 복지를 대체했던 친족이나 가족은 안전망보다 고통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자기실현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 만큼 좌절에 따른 고통도 커졌다. 반면에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인 폭력은 줄어들거나 벌금으로 대체되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고통의 체감이 달라졌기에 공감은 쉽지 않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은 고통도 있다. 2020년에만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2062명이고 재해를 입은 사람도 10만8379명이다. 산재로 인정된 사람들이 한 해에만 이 정도이다. 이 정도면 진지한 공감이 가능할 것 같은데, 노동의 고통은 존재하지만 은폐되고 수시로 발생하지만 예외로 치부되며 개인화된다. 사회적으로 인식되지 않은 고통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이와 비슷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소수자들의 고통도 개인화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기본전제로 ‘공통감각’을 꼽는다.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을 타인이 보고 자신이 듣는 것을 타인도 듣는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즉 내가 보고 듣는 것을 타인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나는 유령이나 미치광이가 된다. 공통감각은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되새기게 하고, 그 감각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삶과 고통에 직면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당사자는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외침은 들으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언어가 될 수 있다. 드러나는 것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때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듣고 보지 않으려는 곳에서는 세계가 구성되기 어렵다. 모두가 개별자이고, 그들 사이에는 공통감각이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이 개인화될수록 공통감각의 구성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고통의 무게는 가중된다. 우리는 내가 보고 듣는 것을 타인도 보고 듣는다고 믿고 있을까? 지금의 한국사회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단어인 ‘혐오’는 공통감각의 상실을 뜻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타자가 보고 듣는 것을 나도 감각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너는 왜 이것을 보지 않느냐는 질책보다는 무엇을 보고 듣느냐고 물으며 서로 마주하고 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같이 감각을 나누고 함께 세계를 구성할 규칙과 상식을 재구성할 새로운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막혀버렸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정의를 대변하겠다고 주장하지만 타자의 눈에 보이고 들리는 세상에 관해, 은폐된 고통에 관심이 없다. 외려 정치는 자기편 얘기만 믿으라며 공통감각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다.

당장의 대통령 선거도 걱정이지만 이것이 정말 걱정이다. 공통감각의 상실은 고통의 무게를 줄이며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세계를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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