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마비시키자, 개인정보 해킹 보복했다.. 두 나라의 사이버戰

남지현 기자 2021. 11. 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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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란 사이버 전쟁 격화
이란 정부 보조금 사용 주유소 타격
광고판엔 하메네이 조롱 문구도
NYT "공격 배후엔 이스라엘 있다"
이란, 성 소수자 등 신상 SNS 공개
"군사적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도"
지난달 27일(현지 시각) 에브라힘 라이시(오른쪽) 이란 대통령이 수도 테헤란의 한 주유소를 방문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날인 26일 이란 전역의 주유소 4300곳에서 주유기가 일제히 작동을 멈추고 모니터에 최고지도자 전화번호 숫자가 뜨는 상황이 발생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 이스라엘 정부가 벌인 사이버 공격이라고 보도했다. /AFP 연합뉴스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사이버 전쟁이 최근 군사 시설을 넘어 민간을 겨냥한 공격으로 확대,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27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최근 이스라엘이 사이버 공격으로 이란의 주유소를 마비시키자, 이란은 이스라엘 인구(878만7000명)의 약 17%인 150만명의 개인 정보를 해킹하며 보복에 나섰다. 보안망이 견고한 군사 시설 대신 보안이 느슨한 민간 영역을 공격해 혼란을 일으켜 상대국 정부에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민간 부문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자칫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어 새로운 ‘미래 전쟁’ 시나리오를 보여준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란에서는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전국 주유소 4300곳에서 주유기가 일제히 작동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작동을 멈춘 주유기 상단의 작은 모니터에는 “사이버 공격 64411″이라는 문구만 깜빡거렸다. 64411은 이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사무실 전화번호다. 주유 중이던 시민들은 갑자기 휘발유가 끊긴 주유건을 들고, 영문을 모르는 주유소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전국 곳곳에서는 주유하러 온 수십 대의 차량이 순식간에 주유소 밖까지 긴 행렬을 이뤘다. 테헤란 등 이란 주요 도시의 도심 한복판에 설치된 상업 광고판에는 “하메네이, 내 연료는 어디에 있지?”라는 문구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이 문구도 해커들이 광고판에 띄운 것이다.

이날 사이버 공격으로 먹통이 된 주유기는 이란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기계였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한 달에 차 한 대당 60L의 연료를 시가의 반값에 구매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경제난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이란 국민들은 유류 보조금에 의존한다”며 주유 대란이 대다수 이란 국민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전했다. 이란 석유부는 바로 전국 주유소에 엔지니어들을 급파해 먹통이 된 주유기를 수동 모드로 전환하는 등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연료 공급망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는 12일이 걸렸다. 이란 정부는 민심을 조기에 진정시키기 위해 이례적으로 공개 사과문을 발표했다. 모든 차주에게 보조금으로 살 수 있는 연료를 10L씩 추가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아볼하산 피루자바디 이란 국립사이버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국영방송 인터뷰에서 “오늘 공격은 외국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27일 두 명의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이날 공격이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감행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란 주유소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발생한 지 일주일 후인 지난 2일 이란 보복 공격에 나섰다. 이란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해커 집단 ‘검은 그림자’가 이스라엘 내 사립 병원들과 성소수자 데이팅 사이트를 해킹했다. 이들은 해킹을 통해 빼낸 민간인 150만명의 개인 정보를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온라인에 유포했다. 해커들은 이스라엘 병원 홈페이지를 해킹해 환자들의 이름과 연락처, 질환 등 민감한 개인 정보를 빼냈다. 이스라엘 최대 성소수자 데이팅 사이트 ‘아트라프’에서는 이용자의 이름, 주소, 성적 지향 등을 빼내 온라인에 유포했다. 이란 해커들은 정보 유출을 멈추는 대가로 아트라프에 100만달러(약 11억9400만원)를 요구했다고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가 전했다.

이스라엘 정부 요청에 따라 텔레그램 측이 개인 정보가 업로드된 채널을 폐쇄하면, 해커들은 새 채널을 열어 다시 정보를 올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렇게 퍼진 개인 정보를 이용해 또 다른 해커들이 피해자 개개인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해킹해 돈을 요구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국 에디터 벤 코디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벌이는 (사이버) 전쟁에서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가운데 끼어 포로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민간 영역을 겨냥한 이 같은 사이버 전쟁이 양국 간 갈등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블라바트닉 사이버연구소의 길 바람 연구원은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물밑에서 벌어지던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버 전쟁이 최근 1년 사이에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 아니라 그 대상도 군사시설에서 민간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민간에 대한 공격이 인명 피해로 이어지면 이스라엘과 이란 간 갈등 수위는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메이삼 베라베쉬 전 이란 정보부 수석 분석가는 “우리는 지금 위험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군사 충돌과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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