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맞선 흑인 여성, 판테온에 잠들다 [시스루 피플]
[경향신문]
프랑스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한 미국인 무용수, 세계 최초의 흑인 여성 슈퍼스타, 제2차 세계대전 스파이, 프랑스 공군 소위, 인종차별에 맞선 인권운동가. 여러 직업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삶을 살아온 조세핀 베이커의 인생에는 일맥상통하는 가치가 있었다. 바로 자유와 정의다. 이는 그녀가 프랑스 위인들을 기리는 판테온에 입성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주었다.
베이커는 30일(현지시간) 흑인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판테온에 안치될 예정이다. 판테온은 18세기 지어진 신고전주의 성당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인들의 유해를 안치해두는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에는 장 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 80명이 잠들어 있다. 이 중 여성은 마리 퀴리, 시몬 베이 등 5명뿐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8월 베이커를 판테온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베이커는 1906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학교를 자퇴한 그는 1921년 브로드웨이 최초의 흑인 뮤지컬 <셔플 어롱>에서 배역을 따내며 공연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선 흑인 예술가들에 대한 억압이 극심했다. 그는 인종차별을 피해 1925년 19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재즈의 인기가 뜨거웠던 1920년대 프랑스에서 베이커는 금세 환영받았다. ‘원시적’이거나 ‘부족적’인 모습을 보여달라는 주최자의 부탁에 그는 깃털이 달린 치마만 입고 이국적인 춤을 추면서 당시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공연에 그대로 녹여내며 더욱 인기를 얻었다. 이를 두고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그는 당시 미국에선 불가능했던 공연들을 무대에 올리며 재즈 시대의 성적 해방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파블로 피카소 등 당대 예술가들도 그에게 매료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37년에 사업가 장 리옹과 결혼하면서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의 나치 정권에 전쟁을 선포하자 베이커는 프랑스 정보국과 접촉에 나섰다. 프랑스 군사기록 보관소에 따르면 베이커는 이때 해외 공연을 다니는 동시에 악보에 기밀 정보를 숨겨 다니면서 해외에 있는 프랑스 관리들과 비밀리에 소통하는 연결고리로 활동했다. 그가 유명한 연예인이라는 사실은 정보원이라는 이중 신분을 가리기에 유용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베이커는 나치를 위해 공연하길 거부했다. 세계 2차대전을 연구해온 한나 다이아몬드 카디프 대학교수는 “베이커는 나치즘이 위험하다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본인이 경험한 인종차별과 나치즘이 유사한 개념이라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이커는 이때도 극단원에 연합군 첩자를 숨겨서 다니는 등 사형을 무릅쓰고 프랑스 해방군을 위해 계속 활동을 해 나갔다. 그는 1944년 프랑스 해방군 공군에 소위로 입대해 참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이커는 또 다른 불의에 맞서 싸우길 택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인권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1951년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가 미 연방수사국(FBI)의 눈 밖에 나면서 10년간 입국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입국 규제가 풀리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1963년 워싱턴에서 25만명 앞에서 다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12명의 아이를 입양해 ‘무지개 부족’이라는 대가족을 이루면서 “유대관계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이커는 1975년 4월9일 공연을 마치고 파리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사흘 뒤 숨을 거뒀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기욤 피케티는 “흑인 여성이자 운동가, 또 예술가로 살아온 베이커를 판테온에 입성시킨다는 것은 프랑스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국가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내는 것”이라 평가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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