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 황순원 [엄재식의 내 인생의 책 ②]
[경향신문]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꽤 들었어도 <소나기>는 여전히 뭉클하고 애틋하다. 어린 시절 마을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에 그때 소년들의 마음이 딱 그랬던 듯싶다. 주인공 소년은 소설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소녀 역시 명확하게 마음을 전달하지 않는다. 예전 광고 노래가 그랬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저 바라보면….’
<소나기>는 잘 알려진 대로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다. 서로 쑥스러워 말하지 못한 채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소나기를 함께 맞았고, 그래서 아팠고, 괜찮냐고 제대로 묻지 못했는데 멀리 떠나가 버린 이야기. 아주 많은 이들의 성장에는 이토록 아팠던 순간이 존재한다고 <소나기>를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소나기>에 나오는 한 단어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
‘잔망스럽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보기에 몹시 약하고 가냘픈 데가 있다,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 등으로 설명돼 있다. 딱히 부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설명도 아니다.
시쳇말로 ‘라떼’스러운 생각이지만, 오히려 지금은 ‘잔망스러움’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세대 간 시선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그때 맞았다고 여기던 것을 지금 세대는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보기엔 ‘잔망스러운’ 생각과 결정과 도전과 노력들이 우리가 채우지 못했던 미래의 구멍들을 메울 수도 있다. 청춘들이 벌이는 모든 잔망스러운 도전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엄재식 |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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