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까지

2021. 11.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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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은 1978년 자신이 모든 곡을 쓰고 만든 1집 앨범 ‘시인의 마을’로 한국 가요계에 홀연히 존재를 드러냈다. 70~80년대의 독보적 싱어송라이터, 출중한 음유가객의 출현이었다. 경기도 평택 갯마을에서 5남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음악에 미쳐 방황하다 운 좋게 서라벌 레코드사에 발탁된 스물네 살 청년은 데뷔하자마자 성공한다.

그는 이듬해인 1979년 MBC 10대 가수 시상식에서 신인가수상을, TBC 방송 가요대상에서 작사 부문상(‘촛불’)을 받았다. 그의 음악 인생에서 유일한 ‘대중적’ 장면이었다. (당시 최고인기 가수상을 받은 사람은 ‘제3한강교’를 부른 혜은이, 남자 가수상은 송창식, 윤수일, 전영록, 조경수, 최헌이었다.) 그는 이후 방송무대가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며 멀리했고 소극장 콘서트만을 고집했다.

정태춘은 1978년 1집 앨범 ‘시인의 마을’로 데뷔하자마자 이듬해 MBC 신인가수상을 받았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음반’에 뽑혔다. 이후 사회운동가로 변신해서 만든 앨범 ‘아, 대한민국’,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포함됐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은 2007년 경향신문이 음악 웹진 가슴네트워크와 함께 53명의 음악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선정한 명반 목록이다. 1위는 들국화의 ‘행진’, 2위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3위는 ‘아침이슬’이 실린 ‘김민기 1집’이었다. 2018년 한겨레신문과 멜론이 선정한 새로운 버전의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도 ‘시인의 마을’과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선정됐다.)  

“살며시 눈 감고 들어봐요/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벗들의 말발굽 소리/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 주리오/내 작은 가슴에 얹어 주리오/누가 내게 탈춤에 장단을 쳐주리오/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가사 전문)

당시 노래를 사전심의하던 공연윤리위원회는 이 노랫말을 보고 원작시를 찾으려 했다고 전해질 만큼 가사는 한 편의 시였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번민의 시인’, ‘고행의 방랑자’라고 했다. 100대 음반 선정 이유에는 이렇게 써있다.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방황과 허무로 일관하며 계속적인 정체 모를 것에서의 도피와 벗어나고 싶어하는 정서를 드러내주고 있다. 떠나고자 하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방황하는 빈 가슴을 품은 채 떠돌아다니는 시인의 모습.”

1집 앨범에 함께 수록된 ‘서해에서’도 그는 허무와 방랑을 노래했다.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서해 먼 바다 위론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섬 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결 따라 멀어져 간다/저 사공은 노만 저을 뿐 한 마디 말이 없고/뱃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육지 소식 전해오네”(가사 발췌)

이 시적 가사는 4집 앨범의 타이틀곡 ‘떠나가는 배’의 프롤로그일 터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 바람을 안고서/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가사 발췌)

1집에는 그의 전 앨범을 통틀어도 많지 않은 쓸쓸한 사랑의 노래가 몇 편 실렸는데 그의 대표곡 목록에 올랐다. 사랑에 눈멀고 실연에 눈물 적시던 70년대 청춘의 가슴팍에 촛농처럼 뚝뚝 떨어진 노래다. 이제 60대가 되었을 이들에게 청춘의 지문처럼 새겨진 노래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창가에 촛불 밝혀두리라/외로움을 태우리라/사랑은 불빛 아래 흔들리며/내 마음 사로잡는데/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촛불처럼 타오르네”(‘촛불’ 부분)

“그대 고운 목소리에/내 마음 흔들리고/나도 모르게 어느새/사랑하게 되었네/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달빛 아래 고요히/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사랑하는 이에게’ 부분)

그해 정태춘은 청아한 목소리의 포크가수 박은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 ‘회상’을 준다. 날마다 개여울에 혼자 앉아서 하염없이 님을 기다리는 김소월의 ‘개여울’을 연상시키는 이별과 그리움의 노래다. 박은옥의 데뷔곡이자 그의 유일한 독집 앨범에 실렸다(1980년 백년가약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부부의 공동 이름으로만 음반을 냈다).

“해지고 노을 물드는 바닷가/이제 또다시 찾아온 저녁에/물새들의 울음소리 저 멀리 들리는/여기 고요한 섬마을에서/나 차라리 저 파도에 부딪히는/바위라도 되었어야 했을 걸/저편에 달이 뜨고 물결도 잠들면/내 가슴 설운 사랑/고요히 잠이 들까/그대 내 생각 잊었나/우리 사랑 잊었나 그대/노래소리 파도에 부서지며/내 가슴 적시던 날/벌써 잊었나 잊었단 말이오/또 하루가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내 가슴 설운 사랑 슬픔만 더해가리”(가사 발췌)

정태춘의 ‘반골적’ 운명은 어쩌면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에서부터 잉태됐을지 모른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가위손 공연윤리위원회(공윤)는 이 노래를 불온하게 해석해 전면 개작을 요구했다.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고 사료됨”이라고 했다.

결국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는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로, ‘텅빈 가슴’은 ‘부푼 가슴’으로,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은 ‘맑은 한줄기 산들바람’으로,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뀌어 음반이 나왔다. 공윤의 검열관들은 ‘민중의 가객’으로 우뚝 서게 될 정태춘의 미래를 예감했을까.

삶의 쓸쓸함, 사랑의 애틋함, 낭만을 넘어선 비감,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황, 대도시를 멀리하고 자연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를 서정적 가사와 선율로 노래한 정태춘은 1987년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돌연 음악과 자기 인생의 변곡점에 선다.

그는 시대의 부조리,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산업 문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노랫말에 담기 시작했다. 무대도 공연장이 아니라 집회장으로 바뀌었다. 사회활동가, 해고 노동자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가사는 사뭇 낯설었다. 환경, 분단, 미군, 5월 광주, 파업, 노동자, 해고자, 도시빈민 등 시대 상황을 관통하는 단어들이 노랫말에 등장했다. 그 스스로 ‘현실도피적 공허한 서정성’에는 이젠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들은 당시의 민중가요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위나 집회 현장에서 다함께 따라 부르기 어려운, 가사와 곡조에서 어떤 ‘쓸쓸하고 고급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산문적이고 언더그라운드 작가주의적 노래들은 그만이 무대에서 기타를 들고 조용히 부를 때 사람들을 감화하는 힘을 발휘했다. 떼창을 하는 선동적 노래가 아니었다. 정태춘은 음악적인 면에서 민중에 다가서길 원했지, 민중이 자신의 노래를 투쟁의 도구로 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사회성과 서정성이 혼합된 모던포크의 걸작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

정태춘의 변신, 그 정점은 1990년의 ‘아, 대한민국’과 1993년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두 불법 앨범이다. 그는 당차게 공윤의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기자회견까지 열어 보란듯이 당국이 허가하지 않은 비합법 음반을 카세프테이프로 출시한다. 가요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곧바로 불구속기소된다. 그리고 동료 가수들의 외면 속에서 홀로 사전심의 폐지 운동을 전개하며 마침내 1996년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지금과는 달리 대중가수의 사회참여가 거의 없던 시절, 정태춘은 6년간 고독하게 저항했고 완전하게 승리했다.

노래 ‘아! 대한민국’은 정태춘의 2기 노래 중 가장 직설적인 절규다. 가사에는 결혼을 못해 농약을 마시는 농촌 총각, 특급호텔 로비에 득실거리는 창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공순이, 하룻밤 화대로 천만원씩 뿌려대는 재벌의 아들, 닭장차와 백골단, 거짓 민주, 거짓 자유란 표현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섬뜩하게 헐떡거린다.

그러나 이어진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이르러서는 숨을 고른다. 동명의 타이틀곡은 사회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지닌 모던 포크의 걸작으로, 전술했듯 두 번의 100대 명반 작업에서 모두 선정됐다. 이전의 ‘아! 대한민국’과 내용적으론 궤를 같이 하지만 음악적으로 거침과 투박을 버리고 정제되고 절제된 정서를 보여준다. 우회적이며 중의적인 가사, 내성적이며 우울한 곡조, 하지만 비둘기는 다시 날아오른다.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가사 발췌)

정태춘은 이 노래에 대해 “한동안 종로는 시대 변화의 욕구, 나쁜 시대에 대한 분노가 들끓는 곳이었다. 그런 흐름이 가라앉으면서 그 거리를 걸어가며 만감이 교차했다. 한 시대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함께 했던 마음을 담아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앨범이 발매된 1993년 정태춘의 가슴에는 ‘회한’과 ‘상실감’이 컸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민주투사들과 운동권은 패배감과 자조감에 빠져있던 때였다. 80년대 후반의 민주화투쟁은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고 노태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이어 90년 갑작스런 3당합당과 93년 김영삼 보수정권의 등장, 김대중의 퇴진으로 시대는 급변하던 때였다.

1991년 음반악법 철폐를 주장하며 비합법적 음반을 전격 발표한 정태춘의 기자회견. (사진=사운드네트워크 홈페이지)

정태춘은 2000년대 들어와 가요계에서 스스로 멀어져 갔다. 10집 앨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년), 11집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년)를 끝으로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30주년, 40주년 때 불려 나와 전국 콘서트를 한 것 외에 조용히 관조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시집 ‘노독일처’와 ‘슬픈 런치’ 두 권을 냈고 붓글에 심취했다.

가객 정태춘(67)의 연대기는 격랑의 현대사다. 그는 탁월한 뮤지션이자 진정한 사회운동가이자, 시적 서정과 현실적 서사를 두루 갖춘,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바탕은 토속적이고 향토적이었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조용하게 소진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는 그를 시청광장에서 보게 되는 일은 없을지 모른다.

“열차는 달리고/나는 거기서 내렸다/쉬어 가는 정거장도 없이 쾌속 질주하는 궤도 열차/거기서 뛰어내리다 보니/좀 다쳤다/피가 흐른다/그리고, 아직도/그 가속도가 내 몸에 남아/그 궤도를 따라 계속 구르고 있다/이제 만신창이가 되어 내가/멈추어 설 땅은 과연 어디일까”(시집 ‘슬픈 런치’ 중 ‘시인의 말’)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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