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술 생태계, 미-중 '디커플링' 맞닥뜨리다
경제·기술 경쟁 분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른바 ‘디커플링’(분리) 가능성이다. 관건은 과연 냉전 때처럼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할 것인지다. 현재로선 두 강대국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완전히 분리되는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그러나 부분적 디커플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미국 행정부의 대외정책 방향을 파악하는 데는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들이 많은 도움이 된다. 싱크탱크들엔 백악관·국무부·국방부·중앙정보국(CIA) 등의 전직 고위 관료들과 민간의 최고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싱크탱크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다시 백악관이나 국무부 등의 요직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경우도 많다. 싱크탱크는 워싱턴에 자리한 대학 4~5곳의 학문적 배경에다 전직 관료들의 실무능력과 정보력 등이 결합하면서 1970~80년대부터 워싱턴 정보 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또한 미국 정부와 의회의 정책 의제 설정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카네기국제평화재단·피터슨경제연구소 등 주요 싱크탱크 3곳이 마주하고 있는 매사추세츠 애비뉴는 ‘폴리시 스트리트’(정책 거리)로 불리기도 한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인근에 있다.
대중국 정책과 관련한 전문가들도 많이 포진해 있다. 대표적으로, 오바마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초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제프리 베이더는 퇴임 뒤 브루킹스로, 그의 후임 에번 메데이로스는 카네기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올해 초까지 브루킹스에서 대중국 전략 연구를 총괄했던 러시 도시는 백악관으로 들어가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담당 국장을 맡고 있다. 민간에서 가다듬은 전략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이들 싱크탱크는 코로나19 상황을 맞아 거의 모든 세미나를 화상회의로 전환했는데, 이들 화상회의와 관련 자료를 실시간으로 온라인에 공개한다. 미-중 경쟁 관련 내용을 보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2015년에도 워싱턴에는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감돌기는 했다. 그러나 미-중 간 경제력·군사력 차이를 분석하거나 ‘투키디데스 함정’ 같은 다소 추상적인 논의가 대부분이었던 반면에, 지금은 민감한 현안을 두고 두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에 관한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지난달에는 브루킹스에서 중국의 대만 공격 시나리오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향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연사는 트럼프 행정부 당시 국방부 전략담당 부차관보로 강경한 대중국 전략 초안을 잡았던 엘브리지 콜비였다. 그는 미국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유인이 커진다며 미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자유주의 성향인 브루킹스에서 이런 토론이 열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워싱턴 분위기가 5년 새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실감케 한다.
현재 미국 정부의 ‘아시아 차르’로 불리는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조정관은 오바마 행정부의 초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거친 외교통으로 대중국 관여 정책을 앞장서 주창해온 인물이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차관보를 마치고 야인 시절이던 2014년 기자에게 중국에 대해 “거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쓰며 관여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올해 5월 스탠퍼드대가 개최한 행사에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넓은 의미에서 ‘관여’로 묘사되는 시대는 끝났다”며 “앞으로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경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경쟁을 만드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앞으로 우려하는 순간이 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경제·기술 경쟁 분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른바 ‘디커플링’(분리) 가능성이다. 디커플링은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말한다. 관건은 과연 냉전 때처럼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할 것인지다. 현재로선 두 강대국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완전히 분리되는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지난 16일 한국유엔체제학회와 카이스트 4차산업혁명정책센터가 개최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시대 한국의 외교·안보전략’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워싱턴의 일부 사람들은 우리와 중국을 연결한 공급망을 변화시키는 ‘그레이트 디커플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실을 오도하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보와 직결된 일부 공급망을 (중국과) 디커플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막대한 경제적 비용 없이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경제를 완전히 디커플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며 “현재의 대중국 관계와 냉전의 차이점은 바로 그 상호의존성”이라고 지적했다.
나이 교수의 주장처럼 현재 미-중 간 경제적 상호의존도는 매우 깊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중국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 부과를 단행하며 의존도를 줄이려는 시도에 나섰지만 지난 3년여간의 실험은 사실상 실패로 평가받고 있다. 미 의회의 초당적 기구인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는 이달 중순 펴낸 보고서에서 “미-중 간에 긴장이 높아졌지만 무역 불균형은 미국이 2018년 중국산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 이전 수준으로 복귀하고 있으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자본 투자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올해 1~8월 2190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4%나 늘었다. 미국 투자자들은 중국의 주식·채권을 지난해 말 기준으로 약 1조2천억달러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2017년 7650억달러에서 57.5%나 급증한 것이다. 중국의 미국 주식·채권 보유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조1천억달러다. 이런 상황은 두 강대국이 상호 간에 격렬하게 제재와 반제재 조처를 취했음에도, 민간 기업과 투자자들의 경제교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와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최근 화상으로 열린 미-중 정상회담 결과도 완전한 디커플링의 가능성을 낮춘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은 긴장 완화를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두 나라 관계가 충돌로 악화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관리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로서 우리의 책임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경쟁이 충돌로 바뀌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도 바이든을 “오랜 친구”라고 응대했다.
그러나 부분적 디커플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부분적 디커플링은 반도체·인공지능·5G 등 미래 산업과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핵심적인 ‘민군 겸용’의 첨단기술 분야 공급망 일부를 분리시키는 걸 일컫는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디커플링이라는 용어만 쓰지 않고 있지, 사실상 부분적인 디커플링을 시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각종 수출통제 제도를 통해 첨단기술 제품의 중국 반입을 제지했으며, 바이든 행정부는 더 나아가 반도체·배터리·핵심광물·의약품 등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지난달 디커플링 이슈를 다룬 ‘분리의 정도’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놨다.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를 거쳐 2017년까지 미 재무부 동아시아과장을 지낸 스테퍼니 시걸 수석연구원이 연구 책임자다. 보고서는 “일정 정도의 기술·데이터 분리는 불가피하다”며 “미국과 중국의 현재 정책이 일정 정도의 기술·데이터 분리를 초래할 것임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고 동맹국·우방국들과 함께 표준을 제정하고 정책을 공조하는 프로젝트를 강조하는 건 미국의 전략이 분리를 독려하는 건 아니지만 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가 이미 ‘오커스’(AUKUS)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미-중 분리’를 맞닥뜨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에, 다른 동맹국들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서, 특히 유럽연합이 주요한 와일드카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많은 것들이 미국이 디커플링의 범위를 얼마나 좁게 또는 폭넓게 추구할지, 그리고 중국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결국 두 강대국의 의도와 행동에 따라 글로벌 경제·기술 생태계가 거대한 변화의 회오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최악의 경우엔, 한국과 같은 끼어 있는 나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까지 내몰릴 수 있다.
박현 논설위원. 1994년부터 경제·국제·사회부에서 주로 일했으며, 워싱턴특파원·국제부장·경제부장·부국장 등을 지냈다. 특파원 시절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 미국의 대외정책과 군산복합체 등을 취재했으며, 2015년 미국의 사드 배치 의도를 폭로한 보도로 관훈언론상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 알리바바 등 중국 주요 첨단기업과 금융회사들의 발전상을 현장 취재했다. G2의 패권 경쟁이 한국 경제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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