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들이 노는 꿈

한겨레 2021. 11. 2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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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초등학교 주차장은 본관 뒤편에 있었다.

주차장 앞으로 간이 화장실과 사택이 사이를 벌려 100포기 안팎의 김장 배추를 거둘 만한 텃밭을 들였다.

엉겁결에 데려온 배추 두 포기 앞에서 내 몸은 자꾸만 어떤 의식 같은 걸 치러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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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숨&결]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안동시 ○○초등학교 주차장은 본관 뒤편에 있었다. 주차장 앞으로 간이 화장실과 사택이 사이를 벌려 100포기 안팎의 김장 배추를 거둘 만한 텃밭을 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텃밭에는 속을 빼앗긴 배추 겉잎이 퍼렇고 싱싱하게 남아, 조금 전까지 얼마나 실한 배추들이 이 자리에 둥둥거리고 앉아 있었는지 짐작게 한다. 저걸 얼마간이라도 거두어다가 들여놓아 주면 닭들이 우르르 달려들며 좋아하련만.

교장 선생님과 인사를 나눌 때 그저 어색한 시간을 녹이려고 “배추 농사가 참 잘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뿐인데, 강의를 마치고 나서는 나에게 담당 선생님은 검정 비닐봉지를 안긴다. 배추 두 포기가 제법 두두룩하다. 수몰 지역의 산모퉁이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비닐 치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닿았을 때는 짧은 초겨울 해가 까무룩 저물었다. 자려고 누웠는데도 문간에 내려놓은 배추 두 포기가 눈에 삼삼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문간에서 하룻밤을 재운 배추를 깨워 소금물에 절여놓고 동네 마트에 나가 무 다섯개, 갓 한단, 쪽파 한단, 배 한알, 생새우·고춧가루·마늘·생강·찹쌀가루 따위 집에 없는 김장 재료를 사 갖고 들어왔다. 찹쌀가루를 찬물에 풀어 너무 묽지도 되직하지도 않게 풀을 쑤고, 말린 표고버섯, 양파·사과·배·파뿌리·다시마·멸치를 냄비에 안치고 육수를 낸다. 까나리액젓과 생새우, 새우젓, 배·사과·양파·마늘·생강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믹서에 갈아 양념을 장만한다. 이것들을 양푼에 부어 골고루 섞은 다음 무·당근·갓·쪽파를 채 썰거나 쫑쫑 썰어 여기에 붓고, 고춧가루와 함께 버무린다. 이러는 사이사이 밖에 나가 장독대에서 몇년을 엎어져 있던 항아리를 말끔히 씻어 물기를 가셔놓고 김장독 묻을 구덩이를 판다. 짚으로는 김장독에 둘러줄 보온용 이엉을 엮었다.

작으나마 김장독까지 묻어가며 김장을 하는 건 이십여년 만에 처음이다. 엉겁결에 데려온 배추 두 포기 앞에서 내 몸은 자꾸만 어떤 의식 같은 걸 치러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젊은 날의 어머니가 불려나와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고(백석), 말 없으나 다정한 아버지는 마당에 주저앉아 눈 감고도 익은 손을 놀려가며 한발 두발 이엉을 엮는다. 그러는 곁에 쪼그리고 앉아 동그란 눈에 겨울맞이를 익히는 건 눈썹이 유독 까맣고 짙은 나어린 나다.

수몰로 인해 원래의 터전을 빼앗기고 높은 곳으로 옮겨 앉은 초등학교에 다녀오면, 깊고 차갑고 시퍼런 물속에 잠긴 시간의 몸살을 앓는다. 며칠 새 그런 학교를 두 곳이나 다녀오게 되었으니, 이런 즈음이면 물속에서 그림자들이 노는 꿈을 꾼다.

“어젯밤 꿈에 고향엘 갔는데/ 집 앞 냇물에/ 버들치가 아주 여러 마리 놀고 있어./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가까이 가 웅크리고 앉았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건 버들치가 아녔어/ 버들치 그림자였지./ 더 신기했던 건/ 두 손으로 손바가지를 만들면/ 이 그림자 물고기들이 고대로 들어와서/ 곰실곰실 노니는 거라./ 할머니 보여 드리려고/ ‘어머이, 이것 봐유, 이 물고기 좀 봐유!’/ 소리치며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만,/ 잠이 깼지 뭐냐!// 지금은 충주댐/ 물에 잠겨 갈 수 없는 아버지/ 고향 이야기/ 곰실곰실 손이 가려워지는/ 꿈 이야기”(이안, ‘아버지 고향’ 전문).

분명 버들치가 없는 물속인데, 그림자 버들치들이 모여서 논다. 어린 나는 그게 무척이나 신기하다. 두 손으로 손바가지를 만들어 그림자 물고기들을 똑 떠내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간다. 어머니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림자 버들치들을 한 녀석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림자 물고기들은 버들치라는 실상을 잃은 유년의 시간과 공간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김장독은 물속의 그림자들을 불러내어 겨우내 내 안에서 살다 가기를 청하는 기억과 애도의 장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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