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때리는 여중생'들이 떴다
여교사들 28명이 여학생 75명 지도해
"같이 공 차고 같이 골 넣는 기쁨" 만끽
지난 20일 토요일 오전 9시30분. 영하의 온도를 갓 넘긴 입김이 날리는 초겨울의 날씨였다. 경기 파주 엔에프시(NFC) 축구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 앞에 대형 셔틀버스 4대가 반바지 차림의 여중생 70여명을 우르르 내려주었다. 여학생들은 스쾃과 런지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시교육청의 ‘공차소서’ 축구 클럽에 가입해 9∼10월에 토요일마다 집중적으로 축구를 배운 여학생들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여학생 축구 스포츠클럽 활성화를 위해 대한축구협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서울시 여중생들을 상대로 축구 클럽 회원을 모집한 뒤, 동서남북 4권역으로 나눠 팀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코로나19로 인해 자기소개 및 축구 실력을 촬영한 동영상을 제출한 학생들 중 75명을 선발했다. 권역별 팀에는 여성 체육교사 5∼7명이 배정되어 축구를 가르쳤고, 대한축구협회에서도 전문가를 파견해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날은 이들 4권역이 리그전 형식으로 겨뤄 승부를 가르는 날이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오늘 골 때리는 그녀가 되어주고, 이 시합이 남녀평등 축구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며 경기의 포문을 열었다. 학생들은 “공을 차자! 소녀들아! 어디에서? 서울에서! 공차소서 파이팅!”을 외친 뒤 경기에 돌입했다.
선수들은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공은 뻥뻥 날아다녔다. 대한축구협회 자격증을 가진 심판들이 심판을 맡았고, 지도교사들은 목이 터져라 코치를 했다. 오후 2시까지 이어진 릴레이 경기에서 4권역팀이 승부차기 끝에 우승컵을 안았다. 승부차기로 골 넣기에 성공한 4권역 팀 주장 박서영(일신여중 3학년)양은 “팀원들이 안 다치고 건강하게 1등 하는 게 목표였는데, 팀원들이 크게 안 다치고 다 잘해줘서 우승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이긴 팀이나 진 팀이나 신나는 축제였다. 그동안 혼자서 또는 남학생들 틈에 끼어서 축구를 해오면서 함께 축구를 할 여자 친구들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여학생들에게는 여학생들끼리 함께 축구장을 누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방과후 프로그램에서 유일한 여학생으로 남학생들과 축구를 해왔던 김태은(서울여중 3학년)양은 “여자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축구 할 친구가 없어서 축구를 못 하다가 공차소서 프로그램을 알게 돼서 가입하게 됐다”며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여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경기를 하고 순위를 내는 게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축구가 취미인 남채원양은 “지금까지 남학생들과만 축구를 하다가 여자 친구들과 해보니 훨씬 더 잘 맞고 불편함 없이 즐겁게 할 수 있었다”며 “공차소서 덕분에 국가대표들만 올 수 있는 축구장도 오게 되고 처음으로 천연잔디에서 뛰어봐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공차소서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한국 최고의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축구를 배우고 기량을 향상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날 시합에도 김진희·조원희·여민지·이영주 등의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참여해 아이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했다. 김태은양은 “그간 혼자서 축구를 하면서 슈팅이나 드리블 정도만 연습할 수 있었는데, 공차소서에 들어와 포지션별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팀플레이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채원양은 “그간 개인플레이를 했는데 팀으로 배우면서 전술적인 부분과 팀플레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총 3골을 넣어 가장 많은 득점을 한 김보민(용곡중학교 3학년)양은 “여민지 선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너무나 떨리고 영광이었다”며 “공차소서 활동을 통해 드리블이 많이 좋아지고 자신감도 많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조원희 전 남자축구 국가대표는 “취미로 축구를 하는 학생들이라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실력이 예상보다 너무 뛰어나서 그런 선입견을 가진 데 대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며 “몇명은 슈팅 실력이 깜짝 놀랄 정도”라고 말했다. 여민지 여자축구 국가대표는 “아이들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고 즐기는 거 같아서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공차소서 프로젝트는 축구를 사랑하는 여자 교사들의 뜨거운 바람으로 실현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에 축구 지도교사로 참여한 28명의 여자 교사들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축구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공차소서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전해림 난우중학교 체육교사는 “어려서 늘 남학생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축구를 하는 여학생이어서 여학생 축구팀을 만드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며 “아이들이 서로 다른 학교 출신이지만 금세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축구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나 교사들이나 축구의 매력에 대해서는 ‘공유하는 기쁨’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채원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을 차고 같이 골을 넣고 같이 기뻐하는 것에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보민양은 “골을 넣을 때의 쾌감과 쿵짝이 잘되는 팀플레이가 축구의 즐거움”이라고 꼽았다. 박서영양은 “골을 넣는 게 가장 큰 재미이지만, 지더라도 같이 협력을 해서 뭔가를 했다는 게 주는 큰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지역 여성축구 동호회에서 7년째 활동하고 있는 전소올 관악고등학교 체육교사는 “축구는 도움을 받아야만 골을 넣을 수 있기 때문에 협력하고 함께하는 매력이 있다”며 “서로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서 친구도 되고 협력도 하고 서로 격려하고 돈독해지면서 축구도 더욱 좋아하게 되는 걸 보게 되어 보람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공차소서 축구 클럽 활동은 다음달에 마무리되지만, 학생들과 교사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공차소서 프로젝트는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부터 실행까지 책임진 서울시교육청 체육건강문화예술과 박연주 장학사는 “처음에 이게 과연 잘될지 의구심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학생들과 교사들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내년에도 이어나가려고 한다”며 “올해는 4권역으로 운영했는데, 계속 잘 운영해서 궁극적으로 서울시의 11개 교육지원청마다 여중생 축구팀을 가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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