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에 벨기에 호텔에 고립된 배우가 한 일은..<로그 인 벨지움>의 유태오 [인터뷰]

백승찬 기자 2021. 11. 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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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로그 인 벨지움>에서 출연, 연출, 촬영, 편집, 음악을 도맡아 한 유태오. | 엣나인필름 제공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심각했다. 유태오(40)는 지난해 초봄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호텔에 고립됐다. 해외 제작사가 만든 시리즈에 캐스팅돼 촬영하다가 코로나19 팬데믹이 폭발한 것이다. 스태프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국으로 돌아갔다. 유태오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비행기표는 취소되고 국경은 막혔다. 식당은 문을 닫았고 광장에 나가도 경찰이 이동을 종용했다. 유태오는 생각했다. ‘이 바이러스의 정체는 뭐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혼자 죽는 건 아닐까?’ 강박적으로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유태오가 의지한 건 영화였다. 고립 당시 스스로의 모습을 찍었고, 한국에 돌아온 뒤 보충 촬영을 했다. 연기, 연출, 촬영, 편집, 음악을 대부분 스스로 해냈다. 그 결과가 내달 1일 개봉하는 영화 <로그 인 벨지움>이다. 유태오는 최근 화상 인터뷰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선 내 일상에서 무언가 액티비티를 만들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야 했다”고 말했다.

유태오는 어디를 가든 삼각대와 조명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 영상 오디션 제의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호텔에서도 오디션 제의가 와서 주어진 대본을 읽어야 했다. 대사를 받아줄 상대역이 없어서, 생각 끝에 스스로 상대역을 연기해 태블릿PC로 녹화한 후 거기 맞춰 연기해보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유태오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로그 인 벨지움>에서는 상대역 유태오가 갑자기 즉흥연기를 하자 또 다른 유태오가 당황하는 장면으로 연출됐다.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제공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유태오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도 대화한다. | 엣나인필름 제공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속에서 유태오는 수차례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 과거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독어, 현재는 영어, 미래의 꿈을 이야기할 때는 한국어로 말한다. 그림자, 거울 속의 모습 등 유태오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종반부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받은 뒤 유태오는 대기실의 거울 속 자신과 마지막으로 조우한다. 거울 속 유태오는 팬데믹으로 모두 어려운 시기에 배우라는 이유로 어찌 이런 즐거움, 특권을 누리냐고 따져묻는다. 유태오는 이 대목을 “사치스러운 죄책감”이라고 표현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이를 천연덕스럽게 실행하고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어 공개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실행력과 패기다.

<로그 인 벨지움>은 독백 혹은 자아성찰의 영화지만, 연출자로서 유태오는 냉정을 유지했다. 총 80시간 분량을 찍어 1차 편집 때 1시간35분으로 만들었고 결국 상영시간 65분 영화로 완성했다. 유태오는 “우선은 감수성이 잘 전달되는지, 다음으로는 재밌는지 판단했다”고 말했다. 호텔방에서 옷을 벗고 있거나, 일부러 소주를 사와서 마시며 조금씩 취해가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 추후 이 장면들을 살펴본 뒤 곧바로 지워버렸다. 유태오는 “잘라내는데 미련은 없었다”고 전했다.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제공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유태오는 벨기에의 한 호텔에 고립돼 홀로 숙식을 해결한다. | 엣나인필름 제공
<로그 인 벨지움>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제공


<로그 인 벨지움>을 보면 영화와 다른 예술에 대한 유태오의 폭넓은 관심을 알 수 있다. 만두를 빚어 먹은 뒤 체하는 장면은 <중경삼림>에서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을 잔뜩 먹는 대목에 대한 오마주다. “사람이 외로울 때 그 사람은 진짜가 된다.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차이밍량의 말도 인용됐다. 유태오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오손 웰즈의 <거짓의 F>의 영향도 언급했다. 유태오는 행위예술가 크리스 버든을 좋아해 그의 책을 늘 들고다닌다. 마침 앤트워프에 버든의 조각 <빔 드랍>이 있어 그곳도 촬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제훈, 천우희 등 동료 배우는 물론 음악인 김수철, 학자 이택광 등과 교류하는 장면도 담겼다. 이제훈과 천우희에게 벨기에 촬영분을 보여준 뒤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영화 속에 넣었다. 그들이 유태오의 서울에서의 삶도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자, 곧바로 서울 생활을 편집해 넣기도 한다. 유태오는 “뉴욕의 독립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화평론가가 내 영화를 비평하기 전에 스스로 비평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유태오는 오랜 무명 생활을 거친 뒤 뒤늦게 이름을 알렸다. 한국, 미국, 독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출연 제의를 받고 있다. 유태오는 “사회에서 안 믿어줘도 날 믿어주는 한 사람(배우자 니키 리)이 있어 큰 힘이 됐다”며 “국내외에서 기둥을 굵게 박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 유태오 | 엣나인필름
배우 유태오 | 엣나인필름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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