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불안에..'경제안보 전면전' 칼 빼든 일본

김소연 2021. 11. 29. 17: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미-중 전략경쟁까지 겹쳐
원자재 수급 '흔들' 산업생산 '휘청'
아베 때부터 전담부서 만들어 대응
기시다 총리 '격전' 표현 써가며 각오 다져

정부 나서 주요 반도체 기업 자국유치
인공지능·양자 등 연구개발 지원도
한국과 달리 범정부적 회의체 꾸려 추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9일 첫 ‘경제안보 추진회의’를 주재했다. 총리 관저 누리집 갈무리

“세계 각국이 전략 물자와 주요 기술 확보를 위해 격전을 벌이고(鎬を削る) 있다. 우리의 경제안보 대책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19일 오전 10시 총리관저 2층.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처음 소집된 ‘경제안보 추진회의’에서 현재 빠르게 진행 중인 글로벌 공급망(supply-chain) 재편 등 경제안보의 위험 요인에 대처하는 일본의 각오를 ‘격전’에 임하는 자세를 빗대 표현했다. 이날 기시다 총리가 격전을 벌인다는 말을 할 때 사용한 시노기(鎬)란 단어는 일본도의 칼등과 칼날 사이의 두껍게 튀어나온 부분을 뜻한다. 공격하는 상대의 칼날을 이 부분으로 받아내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마련 중인 경제안보 대책을 일본의 국운을 건 ‘진검승부’로 비유한 꼴이 된다. 그런 중요성 때문인지 이 회의의 의장은 기시다 총리가 직접 맡았고, 고바야시 다카유키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 기시 노부오 방위상 등 전체 각료가 총출동했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기술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진행 중인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전세계 주요 국가들의 공통 과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요소수 사태’가 벌어진 직후인 9일 국무회의 머리발언에서 “국제 분업체계가 흔들리고, 물류 병목 현상과 저탄소 경제 전환이 가속화되는 산업 환경의 변화로 공급망 불안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되었다”며 “차제에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따른 원자재 수급 문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산업통상자원부는 11일 ‘공급망 안전 점검회의’를 개최했다. 일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글로벌 공급망 안전 확보와 첨단기술 개발 등 ‘경제안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총리가 의장을 맡아 전체 부처가 협력할 수 있는 회의체를 만든 것이다.

물론 경제안보에 대한 관심이 기시다 정권 들어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미-중 전략 경쟁이 노골화되고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일본에선 ‘경제안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해 2월 ‘세계의 공장’을 자임하던 중국 주요 도시들이 봉쇄되며 글로벌 공급망에 큰 타격이 가해졌다. 중국에 기대고 있던 주요 부품 조달이 막히며 세계 주요 자동차 기업들은 일시적으로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당시 자민당에선 “한 나라를 죽이려면 미사일까지도 필요 없다. 의료용품 수입이 끊기면 의료 현장은 바로 혼란에 빠진다”는 비명이 들려왔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이런 상황에 맞서 지난해 4월 국가안전보장국(NSS) 아래 ‘경제반’을 새로 만들었다. 두달 뒤인 6월 자민당의 정무조사회 아래엔 ‘신국제질서창조전략본부’가 만들어졌다. 전략본부는 13번의 회의를 거쳐 그해 12월 에이포(A4) 70장 분량의 ‘경제안보전략의 책정을 향해’라는 제언을 발표했다. 제언에는 경제안보의 필요성 등을 언급하며 “지금의 국제정세가 경제적 요인이 안보를 크게 좌우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국가안보전략에는 경제안보 시각이 명확히 포함돼 있지 않다”며 “경제안보 전략을 마련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정조회장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기시다가 총리직에 오르자, 전략본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고바야시 의원을 경제안보 담당상으로 발탁한 것이다. 기시다 정부는 기타무라 시게루 전 국가안전보장국장 등 외교·안보·경제 분야 관계자 18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를 만들어 ‘경제안보 법안’(가칭)을 추진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내년 7월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에 앞서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회의 머리발언에서 경제안보 추진회의의 목표를 △공급망을 강인하게 만들어 일본 경제의 자율성을 향상하는 것 △인공지능·양자 등 중요 기술의 육성에 노력해 일본 기술의 우위성과 불가결성을 확보하는 것 △기본적 가치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유지·강화해가는 것 등 세가지로 꼽았다.

첫번째 목표인 ‘글로벌 공급망’에 대해선 반도체, 대용량 전지, 광물자원(희토류) 등 이른바 ‘중요 물자’나 그 원재료들의 일본 내 제조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일본에 생산 시설을 지으면 정부가 직접 보조금을 주겠다는 것을 법안에 명시할 예정이다. 대표적인 사업이 ‘산업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다. 일본 반도체는 1980년대 후반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대만 등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다. 그로 인해 전체 수요의 60% 이상을 대만·중국 등에서 수입하는 중이다. 자연재해나 외교적 갈등으로 공급망에 문제가 생길 경우 산업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런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요 해외 반도체 업체의 국내 투자 유치에 나섰다. 그에 따라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가 지난 10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초기 설비 투자액이 약 8000억엔(8조4000억원)에 이르는데, 이 중 절반인 4000억엔을 일본 정부가 보조할 방침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3일 일본 정부가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 등을 히로시마에 유치하기 위해 2000억엔을 보조하는 것을 검토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두번째 첨단기술 연구개발 지원과 관련해선 5000억엔(5조2000억원) 규모의 경제안보 관련 기금을 별도로 만들어 지원할 계획이다. 중국 등을 염두에 두고 기밀유출 부분도 정비된다. 통신이나 에너지와 같은 주요 인프라는 중요한 설비를 새롭게 도입할 때 정부가 사전에 심사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로 했다. 중국 등 안보 측면에서 위협이 되는 국가의 제품이 포함돼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특허 비공개는 안보와 관련한 기밀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특허출원을 할 때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 방침이다.

세번째 목표의 달성을 위해선 핵심 안보동맹인 미국 등과 협력을 심화해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당시 총리는 지난 4월16일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공급망 구축과 함께 5세대 통신(5G) 등 최첨단 통신기술 개발에 양국이 45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그와 함께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의 4자 협의체인 ‘쿼드’도 적극 활용 중이다. 지난 3월 화상 정상회담에 나선 4개국 정상들은 희토류 공급망 협력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았고,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첫 대면 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와 관련해 4개국의 공급 능력을 확인하고 공급망의 안정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미·일은 지난 17일 경제 전반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의 통상 문제, 환경, 공급망, 탈탄소, 디지털 경제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해 협의하는 새 협의체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일본이 미국 등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과 어떻게 균형을 맞출지다. 이와 관련해 일본 내에서도 경제의 ‘탈중국’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오히려 피해가 클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일본 재무성의 ‘무역통계’를 보면, 일본의 대중 수출 비중은 2000년 6.3%에서 2019년 19.1%까지 치솟았다. 수입도 같은 기간 14.5%에서 23.5%까지 늘었다. 사사키 노부히코 일본무역진흥기구 이사장은 최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중국 시장은 일본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는 장소다.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며 “일본이 미국과 소통하면서 중국을 끌어들일 수 있는 국제적인 규칙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스즈키 가즈토 도쿄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도 <동양경제> 온라인판 기고에서 “경제안보는 자유무역이나 자본의 자유 이동으로 최적화된 공급망을 인위적으로 수정하겠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질서와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며 “다른 나라에 일방적인 무역제한 조처나 제재를 (취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국제규범에 입각한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