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냉혹한 현실'과 동떨어진 K-반도체 전략

박진우 전자팀장 2021. 11. 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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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4일 9박 11일간의 미국 출장을 마친 뒤 남긴 말이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0조2000억원)를 들여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다. 삼성전자의 역대 미국 투자 금액 중 최고 수준이다. 이런 대규모 투자에도 삼성전자 앞에 놓인 문제들은 해결되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이 부회장 발언의 핵심 내용이다. 그는 “투자도 투자지만, (출장길에서) 현장의 목소리와 시장의 현실을 봤다”고 했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 밝힌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19년 기준 18%다. 10년 전인 2009년에 비해 9%포인트 증가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반도체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파운드리 세계 2위로 인텔을 제치고 글로벌 최대 반도체 회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런 삼성전자에도 언제든 ‘위기’가 찾아올 수 있으며,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이 부회장은 말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쟁자들은 삼성전자 이상의 투자를 통해 시장의 헤게모니 장악, 나아가 반도체 전쟁의 승자가 되려고 한다. 파운드리 분야의 경우 1위 대만 TSMC는 3년간 미국에만 1000억달러(약 119조원)를 쏟아 붓는다. 반도체 터줏대감인 인텔 역시 200억달러(약 23조8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신설을 예고했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올해 2분기 기준 14%로 1위 TSMC(58%)와는 격차가 꽤 크다.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인텔의 거센 도전도 받고 있다. D램 분야에서는 세계 3위 미국 마이크론이 10년간 1500억달러(약 180조원)를 쓰겠다고 한다.

이런 기업 투자에는 반드시 국가 정책이 맞물린다. 실제 반도체 패권 전쟁은 개별 기업의 싸움이 아닌 국가전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반도체 전쟁의 또 다른 특징은 국가는 구분하지만 기업은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라도 우리 땅에 시설을 지어주기만 하면 돈을 내어주겠다는 게 지금 펼쳐지고 있는 반도체 국가전의 양상이다.

미국 하원 승인을 앞둔 ‘반도체생산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은 미국 내 반도체 시설투자액의 40%를 세액 공제로 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 법안대로라면 약 20조원의 미국 투자 중 법인세로만 8조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일본은 내년 정부 예산안에 반도체 기업 지원기금 재원으로 약 6000억엔(약 6조3000억원)을 책정했고, 이 가운데 4000억엔(약 4조2000억원)을 큐슈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TSMC 한 곳에 지원한다. TSMC는 대만 기업이다.

반도체업계는 반도체에 대한 국가 투자를 ‘특혜’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의 안이한 현실 감각을 비판한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 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핵심전략산업 특별조치법’을 마련했지만, 국회는 지난 5월부터 반년째 아무런 논의가 없다. 이 법의 부대 법안으로 준비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의 내용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법안은 기술개발에 40~50%, 시설투자에 10~20%의 공제율을 적용하는데, 이런 혜택으로는 해외 기업은커녕 국내 기업의 투자 유치도 어려워 보인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6월 경기 화성시 반도체연구소 간담회 때에도 “가혹한 위기 상황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본다면 정부와 정치권의 안이한 태도가 곧 이 부회장이 언급한 ‘냉혹한 현실’이오, ‘가혹한 위기’ 상황이 아닐까. 개별 기업의 반도체 산업 내 경쟁력은 높지만, 국가 전략은 결여된 한국이 미래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기업이 대비를 못 했다”라는 말로 기업을 탓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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