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 폭탄'으로 암 방어벽 깨는 '유전자 조작' 대장균 개발
미국 신시내티대, 저널 '어드밴스트 헬스케어 머티어리얼스' 논문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박테리아 하면 대개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 폐렴, 수막염, 피부 염증 등은 모두 박테리아 감염으로 생긴다.
우리 몸엔 세포 수의 최고 두 배에 달하는 박테리아가 있다.
흔히 아는 장(腸)과 피부는 물론이고 폐, 구강 심지어 암세포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많다.
그렇다고 유해한 세균만 있는 건 아니다. 알고 보면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 ㆍ활생균)로 불리는 몸에 이로운 세균도 적지 않다.
미국 신시내티대 과학자들이 암세포를 찾아내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프로바이오틱스 조작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유전자 조작 박테리아를 기존의 항암 면역요법과 함께 쓰면 치료제가 종양에 잘 스며드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날리니칸트 코타기리(Nalinikanth Kotagiri) 약물학과 조교수 연구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최근 저널 '어드밴스트 헬스케어 머티어리얼스(Advanced Healthcare Materials)'에 논문으로 실렸다.
논문의 교신저자를 맡은 코타기리 교수는 신시내티대 암 센터의 고형암 전문가다.
29일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 사이트(www.eurekalert.org)에 공개된 논문 개요 등에 따르면 고형암(solid cancer)은 혈액암의 상대적 개념으로 유방, 전립선 등 고형화된 기관에 생기는 암을 말한다.
고형암은 혈액암보다 면역치료 반응률이 훨씬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유형의 고형암은 콜라겐과 히알루론산(hyaluronic acid)으로 구성된 세포외 기질(extracellular matrix)로 싸여 있다.
면역요법을 써도 항체나 면역세포가 이 기질 방어벽에 막혀 종양 안으로 잘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치료용 세균 균주로 많이 쓰이는 '대장균 니슬(E. coli Nissle)'의 유전자를 조작했다.
발견자(독일의 알프레드 니슬 박사)의 이름을 딴 이 대장균(약칭 EcN)은 병원성 장내 세균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며, 장염을 일으키는 대장균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조작된 대장균 니슬은 암세포의 방어벽(세포외 기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생성하고, 이 효소가 적재된 소낭(vesicle)을 암세포의 외막에 대량으로 분비한다.
연구팀은 박테리아가 방출하는 외막 소낭에 내부와 동일한 물질만 실린다는 점에 착안했다.
대장균 니슬이 고형암이 좋아하는 저산소, 면역결핍 환경에서 잘 증식한다는 점도 고려했다.
효소가 가득 든 소낭을 분비하는 이 대장균이 저절로 암세포를 찾아가는 건 모두 이런 성질 덕분이다.
코타기리 교수는 "고형암 종양을 찾아가 자리 잡는 니슬 균주의 특성을 이용했다"라면서 "일단 종양에 붙으면 효소가 실린 소낭을 방출해 종양 깊숙이 침윤하게 한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런 대장균을 함께 쓰면 항암 면역 치료제나 화학 치료제의 효과가 훨씬 더 강해졌다.
연구팀은 유방암과 결장암이 생긴 생쥐 모델에 조작된 대장균을 주입하고 나흘 내지 닷새를 기다렸다. 대장균의 효소에 의해 암 종양의 방어벽이 해체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면역 치료제와 다른 표적 치료제를 함께 투여하자 생쥐의 생존 기간이 치료제만 준 경우의 2배로 늘어났다.
대장균과 효소가 암세포의 세포외 기질을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치료제가 종양 안에 안정적으로 도달하는 과정은 진단 영상에도 생생히 잡혔다.
조작된 대장균은 또 심장, 폐, 간, 뇌 등 다른 기관엔 전혀 감염하지 않아 안전성 측면에서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연구팀은 장차 이런 방식의 유전자 조작 세균을 장, 구강, 피부 등의 감염 치료에 직접 쓸 수 있을 거로 기대한다.
또 복합 단백질과 분자로 세균을 무장하면 단일 요법(monotherapy) 플랫폼으로 개발하는 것도 유망하다고 본다.
물론 대전제는 임상 시험을 통해 효과와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는 것이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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