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무르고..금리 내리고..원금도 깎고 [금융 플러스-대출자의 권리장전]
소득·재산이 늘어나면 금리인하요구권
채무조정요청권도 연내 국회제출 전망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우리나라 가계신용 잔액은 1844조9000억원이다. 올해 인구가 5182만명이란 점을 고려하면 1인당 3560만원의 빚을 지고 있을 정도로 대출이 보편화된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가 모든 국민에게 장기저리의 대출을 해주자는 ‘기본대출’을 공약하고, 실제 국회에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 제출돼 있을 만큼 대출은 일종의 기본권이란 인식도 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대출자를 위한 권리장전’의 필요성이 높아진 이유다. 정부는 대출 계약에서부터 상환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대출자의 권리를 새롭게 강화하고 있다.
▶ “생각해보니 필요없어요... 대출 무를래요”=대출 계약 단계에서 대출자가 갖는 권리는 청약철회권이다. 대출 계약을 맺은 뒤 14일 이내에 철회할 수 있는 권리다. 일단 계약을 했더라도 천천히 고민해보고 최종 결정을 할 수 있게끔 시간을 주는 숙려제도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당초 신용대출은 4000만원, 담보대출은 2억원 이하인 경우 등에만 제한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는데, 올해 3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시행되면서 대출액에 제한없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권리인만큼 중도상환수수료 등의 불이익은 없다. 대출기록도 삭제되고 신용점수에도 영향이 없다. 짧지만 대출이 나간 기간 동안의 이자 등 비용만 원금과 함께 상환하면 된다.
이용 실적도 늘어가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은행)의 청약철회권 승인 건수는 4월 1342건에서 9월 2822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문제는 일부 악용하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공모주 청약, 아파트 청약 등을 위해 거액의 급전이 필요할 때 잠깐만 빌렸다가 청약철회권을 이용해 갚는 행태다.
금융소비자보호 감독규정에는 동일한 금융사를 상대로 한 달에 두 번 이상 청약철회권을 행사한 경우, 금융사가 소비자에게 불이익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연간 횟수 제한은 없다보니 악용 우려가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 “월급 올랐어요 금리 내려주세요”=대출을 유지하는 단계에서 대출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금리인하요구권이다. 대출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소득 및 재산이 증가하거나 신용평점이 상승하는 경우 금융사에 금리인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업권별로 자율적으로 운영해왔는데, 2019년 법제화됐다.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신청건수는 빠르게 늘고 있다. 2017년 19만8000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91만1000건으로 네 배 이상 늘었다.
특히 최근에는 금융당국이 대출 금리가 급등한 데 대한 핵심 대책으로 들고 나오면서 주목도가 높아진 상태다. 당국은 권리에 대한 안내 및 홍보를 강화하고, 심사기준도 투명화하는 등의 제도 개선 방안을 지난달 내놓았다.
문제는 신청이 늘어도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2017년에는 수용률 61.8%로 절반 이상이었지만, 지난해에는 37.1%로 세 건 중 한 건 꼴에 그친다. 불수용 결정이 나도 왜 거절됐는지 이유도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이 시장의 불만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수용률이 낮은 이유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이 소득과 재산인데, 취업을 한다거나 상당한 폭으로 오르지 않는 이상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또 신용도가 높은 사람들은 이미 더 이상 인하할 수 없을 정도로 금리가 낮은 측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신용등급을 매겨서 금리를 결정하고 이는 각 회사의 경영기밀에 해당한다”라며 “금리 인하 기준을 투명화하더라도 차주가 만족할 정도로 공개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 “대출 갚기 힘들어요... 깎아주세요”=대출을 상환하는 단계에서는 앞으로 도입될 채무조정요청권이 버팀목이 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채무조정요청권은 개인채무자가 빚을 갚기가 어려울 경우 금융사에 채무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다. 소비자신용법을 제정해 규정할 계획이며, 현재 법제처 심사를 거의 마무리한 상태로 이르면 다음달 국회에 법안이 제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출된 법안에 따르면, 채무자가 조정을 요청하면 금융사는 10영업일 이내에 조정안을 제안해야 한다. 금융사는 채무 감면율이나 상환 일정 등을 정한 내부 기준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 채무자의 소득과 재산 등으로 빚을 갚기 어려운 상황임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금융사 내부 기준과 어긋나면 조정을 거절할 수 있다. 채무자의 협상력을 보강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교섭을 해주는 업체도 생겨나게 된다.
개인이 신청을 하지 않더라도 금융기관에 의해 조정절차가 시작될 수 있다. 금융사는 개인연체채권에 대한 대출회수와 양도절차를 진행할 경우 사전에 채무자와 채무조정 협상을 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금융회사는 채무자에게 대출회수와 양도 예정일까지 채무조정 요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10일 이전에 통지해야 한다.
소비자신용법이 제정되면 과도한 빚독촉도 제한된다. 1주일에 7번까지만 빚독촉 연락을 할 수 있고, 채무자가 원치 않는 시간대나 장소에서 빚독촉을 말아달라는 요청도 할 수 있다.
연체채무자의 재기를 돕기 위한 제도라는 평이지만, 일각에서는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금융사의 재산권 행사를 제약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재준 인하대 교수는 “정부는 채무조정도 채권자의 의무라고 인식하는 반면, 해외에서도 도입하지 않은 제도를 입법화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이 있다”라며 “금융사가 제시한 채무조정안에 대한 채무자의 수락기간을 명시하는 등 절차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라고 밝혔다.
김성훈 기자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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