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바로가기)
'인민의 호민관': 프랑스의 장 조레스와 한국의 노회찬
2019년 7월 31일 시사평론가 김수민은 '조레스와 여운형, 조봉암과 노회찬의 공통점'(<뉴스톱>)이라는 제목의 글에 이렇게 적었다.
"7월 31일은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와 한국의 정치가 죽산(竹山) 조봉암의 기일이다. 세계대전을 막으려다 극우파에게 암살당한 조레스와 가장 닮은 정치인은 몽양(夢陽) 여운형이다. 좌익통합과 좌우합작, 통일국가 건설의 상징으로 남은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극우파의 흉탄에 숨졌다.
김수민이 호명한 장 조레스는 현재 프랑스 파리 5구에 위치한 팡테옹(Panthéon de Paris)에 묻혀 있다. 팡테옹은 프랑스 위인들의 묘지가 있는 건축물이다. 입구의 삼각형 부조 아래에는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사의를 표하다"(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프랑스를 빛낸 위대한 사람 71명(2019년 1월 현재)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입관되는 것은 프랑스의 명예에 기여한 사람에게 국가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예우이며, 어떤 인물을 입관하느냐에 따라 대통령과 정부의 정치적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한다.
"인민의 호민관(Tribune du Peuple)" 이 영예로운 호칭은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 장 조레스(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 1859.9.3.~1914.7.31.)의 묘비명이다. 의사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와 공장에서 대중과 함께 싸웠기에 따라붙은 별칭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정치인'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9.3.~1914.7.31.) 우리에게는 그리 낯익지 않은 이름이다. 하지만 100년도 지난 시대의 인물인 그를 프랑스인들은 단지 역사 교과서만이 아니라 노래와 영상물을 통해 기억해 왔다. '인민의 호민관'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계급적 당파성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의회정치에서 노동계급의 권리를 옹호한 장 조레스의 정신은 사회주의와 자유를 모두 중시하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토대가 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한다.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장을 역임한 김정진 변호사는 「노회찬을 기억한다」는 제목의 추도사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연전에 빠리 외곽에 가니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에 관한 기념물이 있었다. 짧은 불어로 제목을 보니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의 진보정치와 진보정치인이 가야할 길도 이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노회찬 총장의 평생 행보는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라는 문구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 (「노회찬을 기억한다」, 정의정책연구소 홈페이지, <이사장/소장 칼럼>, 2018.7.31.)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노회찬의 길동무였던 김윤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은 노회찬을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라고 칭했다.
"노회찬의 정치적 삶은 '연대'라는 한 마디의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력의 횡포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시민적 권리를 지켜내고자 애썼던 정치가였다. 그는 여성, 노동자, 철거민, 청소 노동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었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정치다운 정치'를 구현코자 했던 이가 걸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길이었다." (김윤철, 「'약자들의 벗',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2007년 7월 31일 인터넷 언론 <레디앙>에 올라온, 민주노동당 당원번호 79503번 님이 쓴 「H.O.T 팬에서 노회찬 팬으로」라는 제목의 글에는 2005년 국회에서 노회찬이 삼성X파일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밝히는 것을 보고 '인민의 호민관 장 조레스의 발굴'이라고 적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회찬 의원이 대중들에게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여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똑 부러진 주장과 특유의 입담으로 우리네의 아픈 곳을 다독거려 주었지만 이 여름 이후에 노회찬을 보고 힘을 얻은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장 조레스의 발굴이라고나 할까요? '인민의 호민관'말입니다. 저에겐 그 해 여름이 호민관 노회찬을 발견할 수 있던 여름이었답니다."
공화정 시절의 로마는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이 서로 견제하는 균형 잡힌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집정관이 행정부의 수반이라면 원로원은 의회이자 최고 재판소였다. 오직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될 수 있는 호민관은 독재권력의 출현을 막고 원로원을 장악한 귀족계급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임기도 1년으로 제한해 권력의 사유화를 어렵게 했다.
'인민의 호민관', 그것은 스스로 원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님은 물론이다. 참으로 쉽지 않은 삶의 여정 속에서, 아니 삶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에 의해 공인된 어떤 것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작품 '함께맞는 비'와 '愚公移山'(우공이산)이 함께 잘 어우러져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신영복은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라며 노회찬에게 글을 많이 써 주었다. 그 가운데 노회찬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17대 국회의원 시절인 2005년 2월 15일의,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함께맞는 비'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영복이 노회찬에게 '우공이산'(어리석은 노인의 우직함이 산을 옮깁니다)을 함께 선물한 까닭은 아마도 '함께맞는 비'의 길이, 그리고 산을 옮기는(세상을 바꾸어 가는) 길이 말처럼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정치인 노회찬'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장 조레스와 노회찬.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이들에게 붙여진 '인민의 호민관'이라는 호칭이 과한 말은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2021년 3월 노회찬의 길동무 장석준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노회찬재단 사무처와의 간담회에서 "조레스와 노회찬의 삶에는 교차점들이 여럿 있다"면서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조레스와 노회찬 모두,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당대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며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사회주의의 신념과 실천을 강화했다. 조레스의 경우는 제3공화국의 공식 정치질서 안에서 가장 개혁적이라던 정파가 실은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대변자임을 깨달으면서, 노회찬의 경우는 군부독재세력과 리버럴 야당의 타협으로 등장한 제6공화국을 처음부터 비판하고 이 타협을 넘어서려는 정치운동에 나서면서, 평생에 걸친 실천의 첫 발자국을 떼었다. (…)
조레스와 노회찬의 정치 인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공통점은 각각 자기 나라 안에 강력한 좌파 대중정당을 건설하려고 평생에 걸쳐 노력했다는 것이다.
(…)
조레스와 노회찬의 인생에는 묘한 역설의 구간이 있다. 두 사람 다 정치 이력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극복 대상으로 삼은 그 현실 민주공화국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야만 했다. (…)
그럼에도 조레스와 노회찬 모두 정치 활동의 본령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이미 우리가 확인한 바,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 그것이었다. 그들이 각각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방어자로 나섰다면, 이는 오직 그 정도의 민주공화국이라도 갖춰진 다음에야 이를 넘어서는 시도들 역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레스와 노회찬, 흔들리는 '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자」, 2021.3.3.)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향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정치가 장 조레스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현실 정치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장 조레스. 그는 프랑스 통합 사회당의 지도자이자 일간지 <뤼마니테>의 창립자였다. 조레스는 평생 동안 남긴 저서가 80~90권에 달할 정도로 항상 배우고자 했던 지식인이었고, 30년 동안 6선 의원으로 활동한 정치인이었으며, '드레퓌스 사건' 당시 사회주의자로서 유일하게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인본주의자였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YES24 책소개: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1885년 총선에 출마한 조레스는 공화파의 정당명부 비례대표 하원 의원이 됐다. "정치라는 직업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26살 최연소 의원이었다. 장 조레스는 본래 공화파였지만, 사회주의자가 했다.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의 강력한 결합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나타난 것이다. (노서경, 「해제: 사회주의 정치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조레스의 삶의 여정에서 극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들어간 의회에서의 노력과 번민, 기득권세력의 반격에 밀려 패배한 두 번째 선거,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에 연대했다가 광부들의 추천으로 보궐선거 당선, 그리고 현장 가담과 의정활동의 결합...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바로 조레스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낙선 뒤 파리고등사범에서 공부를 계속하며 연하의 스승 뤼시앙 에르를 만나 사회주의 이념을 익히고 그것을 프랑스적으로 소화하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만 보면 노동운동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부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우선 공화파 의원으로 등원하고 나서 그가 겪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계승을 위해 공화파를 선택한 이상주의자 조레스가 목격한 현실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대의보다는 대자본가의 뇌물에 목매단 동료 공화파 정치가들의 추태였다.
1893년 총선은 카르모(Carmo) 광산 파업 투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황에서 닥쳐왔다. 이들의 눈에는 조레스가 그 적임자였다. 1892년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투쟁 당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자본가에 맞서는 노동운동 경험을 쌓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벗이 된 장 조레스는 총선에 출마해 당선했다. 이때부터, 조레스의 이름 앞에는 늘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따라붙게 됐다.
"의회로 간 조레스는 노동자 파업과 의회정치를 통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를 펼쳤다"면서 김수민은 조레스의 정치활동, 의회활동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러한 입장(개혁주의적 사회주의)은 초창기에는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주요 노선으로 등극하지 못했다. 쥘 게드 등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미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공상적 사회주의,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의 전통도 있었다.
한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행동으로 세상을 뒤집는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이 번졌다. 조레스는 이러한 프랑스 사회주의의 역사에 지성적 사회주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불어넣은 장본인이다.
(…)
조레스는 끈질긴 보수파와 유약한 중도파에 대응해 좌파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통합의 전제가 더 깊고도 새로운 원칙을 향한 혁신이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의 주류로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던 게드파의 비난과 조롱에도 스스로의 개혁주의를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이웃나라 독일의 동지들인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룩셈부르크 등에게 비판받았다.
조레스는 때에 따라 유연하게 중도 공화파와의 연합전술을 폈지만 그것은 철저히 공화국 수호라는 당위에 따라 이뤄졌으며 결코 빈자를 위한 강령을 꺾지 않았다." (김수민, 「부당하게 고통 받는 '한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 그의 삶>」, <오마이뉴스>, 2009.11.13.)
19세기 후반 프랑스 3공화정을 살아온 조레스에게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 원칙은 사회주의가 노동계급과 가까워야 하고 그 계급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계급이 인간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인본주의였다. 이 때문에 조레스는 혁명은 계급을 위한 것이라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지탄을 받았으며, 혁명파와의 반목은 걷잡을 수 없게 했다.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세 번째 원칙은 혁명과 개혁의 융합을 지향한 사회주의였다. 조레스에게 혁명과 개혁은 반목적인 것도, 분열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사회주의는 당대의 소렐, 게드, 라파르그와는 달리 언제나 이견을 청취해서 '통합하고 종합'했다. 그에게 '개인주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는 통합론자였던 것이다.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당 통합의 산파 역할을 했으면서도 당권을 강경파에게 내주었으며, 사회주의의 '화합'과 인류의 '평화'라는 두 가지 희망을 모두 놓친 채 숨진, 현실에서는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것은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함성보다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회주의이다. (배성인, 「조레스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월간 워커스>, 20호, 2016.7.28.)
혁명을 꿈꾼 노동운동가에서 진보정치가로 방향을 선회한 노회찬 :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자 "진짜 좋아하는 일이어서…"
"조레스는 PT(프롤레타리아트) 혁명(독재)을, 경우에 따라 선택가능한 하나의 일시적 방법쯤으로 상대화시켰다.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킨다면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노회찬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1988년 13대 총선 이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1992.1.19.), 통합민중당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인민노련은 전위정당론과 PT독재론을 폐기한다.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와 '진보정치연합'을 거쳐 1997년 국민승리21과 2000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합법적-진보적 대중정당 노선의 기저에는 사회주의 혁명론을 폐기한 인민노련의 이른바 '신노선'(문건 이름은 「회사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1991.9.29.)이 있었다.
당시 인민노련 사건으로 감옥(1989.12.~1992.4.1.)에 있었던 노회찬은 훗날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80년대를 지배해온 것은 혁명만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창출하게 했다.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이 보장된 이상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1992년 4월 1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만기 출소한 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노동운동가 노회찬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진보정당이야말로 21세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이 될 것입니다.'
1997년 봄과 여름에 걸쳐 당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만나 수차례 반복해서 한 말이다. 진보정당을 무슨 상품처럼 표현하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었지만 그만큼 진보정당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컸던 것이다." (노회찬, 「후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1992년 총선에서 실패한 민중당의 경험에 대한 반면교사 속에서, 노회찬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은 실패의 배경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지난 10년간의 진보정당운동과 새로운 도전」, 1999.) 1997년 10월 <국민승리21> 출범을 거쳐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은 이 세 가지 실패의 지점을 개선하고 극복하는 데 노력을 경주했다.
"26년 만에 재개된 민주주의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고양이라는 호조건 속에서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것은 여러 요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요인은 주체형성의 문제, 지지기반 특히 노동운동의 문제, 정치적 환경 등의 문제로부터 찾을 수 있다."
노회찬이 꼽은 첫 번째 장애물은 주체형성의 문제로, "진보정당운동은 오랜 세월 동안 반독재운동에서 형성된 진보적 성향의 정치세력들을 최대한 규합하는데 실패했으며 이는 곧 진보정당 건설 동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자정당파와 민주연합파의 분열과 대립이 그것이었다.
두 번째는 진보정당운동은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고양기를 구가하던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을 자신의 조직적 기반으로 모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의 경제주의적 편향, 기업별 노동조합체제라는 구조적인 문제 등이 '정치'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인식을 팽배하게 한 배경이었다.
세 번째는 법적, 제도적 장애로부터 비롯된 정치환경의 문제였다. 국가보안법의 문제, 법적으로 금지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및 교사와 공무원들의 조직화 불허 문제, 선거연령 문제, 정당투표제의 미도입, 각종 법률에 의해 보장된 전통적인 금권선거 등, 이런 정치환경 속에서 약체인 진보정당은 강자들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경쟁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나는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이를 해소해야만 재창당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첫째 이른바 독자 후보와 비판적 지지 등으로 나눠진 재야 운동 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고, 둘째 전노협과 업종회의 등 민주노조들이 공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참가하며, 셋째 신생 진보정당의 진출을 가로막는 선거법을 비롯한 각종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의 총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1997년 대선에 참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의 재창당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요인들에 대해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15쪽)
2000년 1월 30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마침내 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당 대표로는 권영길 창준위 상임대표를, 부대표로는 노회찬(전 진보정치연합 대표), 박순보(전 전교조 부산시지부장), 양경규(민주노총 부위위원장)를, 그리고 사무총장으로는 천영세(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대표)를 선출했다.
훗날 노회찬은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대화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한편 '좌파의 통합'을 추구한 조레스처럼, 노회찬은 "과거의 인맥에 의해 유지되는 퇴행적이고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민주노동당 내 '정파'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물론 노회찬이 정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동당의 태동은 확실히 정파연합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한 민주노동당은 태생적으로 정파연합당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내 각 정파들이 미래지향적인 정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에서의 문제는 정파 간의 담합이 아니라 정파 간의 불건전한 대립과 비생산적인 긴장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근원은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 조성되어 있는 정파 질서가 구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은 21세기에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당내의 정파질서는 20세기적 사고와 전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
"대체로 정파는 정당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반면 인적 친밀도가 높다. 타 정파와의 일상적 경쟁관계 때문에 결속력 또한 높다. 이같은 정파의 강점은 자기정화 기능의 상실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낳기 쉽다. 특히 낡은 전략, 낡은 학교관계, 낡은 서클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파의 경우 조직보존 혹인 조직확장의 논리 앞에 자기정화 기능은 무력화되기 쉽다.
"민주노동당 이전의 운동경험과 조직관계는 각자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야 한다. 이미 물질화된 낡은 관계들은 당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야 한다.
노회찬이 떠나고 난 뒤 2020년 6월의 어느 날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 이래 '전국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노회찬과 함께 한 길동무들이 오랜만에 만나 술 한 잔 서로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말이 나왔다.
"노회찬이라고 왜 계파의 유혹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배신감이나 원망 때문에라도 옛날 같은 조직방식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진정으로 운동의 대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과정(계파 갈등)은 기꺼이 이겨내야 한다. 이 과정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역량의 한계이고, 우리 운동에 최종적 실패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라고." (이인우, 「어떻게 만든 진보정당이냐」, <음식천국 노회찬>, 일빛, 2021)
안팎의 많은 난관에 부닥치면서도 노회찬이 진보정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노회찬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회찬, 「(여는글)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다시, 꿈꾸기 위하여」,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2014년 9월 추석, 노회찬은 취기가 남은 목소리로 장조카 선덕에게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왜 잘되지 않는 일(진보정치)을 계속하는지 아냐. 진짜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래." (<서울신문>, 7.22.)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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