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난하였던 시절의 짧은 이야기들
[김장욱 서울농대 두레풍물패 78학번, 시인]
1.
78년 대학을 입학하여서 이런 저런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교실에 선배들이 등장하여 써클 가입을 권하였다. 서울농대 두레 풍물패였다. 그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걸죽한 막걸리 사발이 쉼없이 돌아가고 역시나 그에 비례하여 오바이트를 해 대면서.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풍물이 뭔지도 전혀 몰랐다. 그냥 내가 좋아하였던 음악의 한 분야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이 소박함이여. 고등학교 때에도 땡땡이 치고 종로 <르네상스>나 명동 <필하모니아>라는 고상하고 우아하였던 클래식 음악감상실을 가끔 출입하였으니, 어떻든 나는 간땡이가 좀 컸었던가?
2.
문제는 이 농악이라는 것이 묘하게 매력이 있는 존재 혹은 대상이라서 혼자서 악기를 치고 있다던지 아니면 함께 합주를 하고 연습을 하는 순간에는 어떤 묘한 친밀감과 동질감, 그리고 함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까지 주는 그런 존재였다. 서로 어울려 대형을 이루고 원도 그리고 선도 그리고 밀고 땡기면서 진법을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참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도 거칠어지고 마침내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뺑뺑이를 돌고 나면 정말 힘들고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그것 또한 매력으로 다가왔으니, 그러고서 마시는 막걸리는 또 왜 그리 맛있던지. 한 잔 걸쭉하게 함께 나누어 마시면 그날 밤은 정신없는 꿈나라를 헤매게 되고 다음날 아침은 왜 그렇게 상쾌하였던지.
일학년 때는 주로 잡색이라 하여서 소고를 들고 행렬 뒤쪽을 따라다니면서 크게 하는 역할은 없었다. 정형화된 춤을 조금 추면서 각자 좀더 익숙해지면 개인기를 살짝 집어넣어 조금 변형을 가해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일년 정도 연습도 하고 합숙도 하게 되었다.
여름합숙도 지나고 겨울합숙이 되었다. 용인민속촌 앞에 숙박지를 정하여 놓고 주로 낮에는 민속촌 안에서 연습도 하고, 또 민속촌 농악대 공연할 때 깃발이라든지 잡색이라든지 조금씩 같이 참여하여서 함께 공연도 하며 그렇게 개인 기량을 늘려나갔다.
아, 정말 나는 개인적으로 장고와 꽹가리를 못쳐도 너무 못쳤다. 리듬감이 듣는 곳으로만 발전한 모양새였는지 진짜로 남들과 또같이 연습하여도 나만 지진아가 되었으니, 결국 악기에서 탈락하고 상모를 맡게 되었으니.
4.
문제는 이 상모였다. 사실 농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 상모춤은 고도의 기량을 필요로 하면서 몸을 거의 45도 각도로 눞여서 회전하는 것이 ‘자반뒤지기’라는 기예인데 이건 정말 몸도 가볍고 타고난 사람들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연마하여야만 도달하는 경지였으니.. 별로 연습도 하지 않고 대충 듬성듬성 하는 나에게는 언감생심.
결국은 열두발 상모로 또 등떠밀렸다. 사실 내 키가 165센티로 남자 치고도 많이 왜소하였으며 우리 농악반 서클에서도 제일 작은 키였으니. 그 작은 키에 제일 긴 열두발상모를 맏게 되고 말았으나 오히려 이 열두발이 나에게는 그렇게 큰 기예연습 없이도 할 수 있는 좋은 파트가 되었다.
5.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그래 열두발로 한 번 폼나게 해보자. 밀리고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더 이상 밀릴 악기도 없고 역할도 없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서클 내부에서도 별로 악기로 취급도 해 주지 않았기에 탐내는 회원 또한 없었다. 일종의 불루오션이었다. 그저 혼자서 돌고 또 돌고 뛰고 또 뛰고..
내 위로 서클 내에서 열두발을 맡았던 선배들은 매우 큰 키가 대부분이었다. 권태호 권일경 형들이다. 우리 기수에 와서 갑자기 쪼글아들고 말았지만 나는 정말 특수한 케이스였었다. 그리고 또 좋은 것은 이 열두발이 거의 풍물 판굿 공연의 맨 마지막에 해당되는 영역이었기에 마지막 피날레 인사를 항상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6.
80년 4월 서울대 전체 축전 겸 해방제를 시작할 때였다. 정확한 명칭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단 서울대 총학생회 주체로 80년 민주화의 봄을 알리는 축전이었으며 그 시작 공연에 우리 농악반이 나가서 길굿 판굿 뒷풀이를 책임지는 공연이었다.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공연이었고 준비 또한 참 많이 한 공연이었다.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던 공연은 결국 큰 문제 없이 서울대 넓은 캠퍼스를 골고루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마치고 마지막 판굿을 대학도서관 앞 광장에서 하게 되었는데 그 사이 마신 막걸 리가 조금 과하였는지 열두발 상모가 처음부터 확 펴지지 않고 꼬였으며, 몸이 함께 도는 것이었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단 취기가 올라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몸을 돌려대었으니.. 밖에서 보던 사람들은 아마도 많이 황당하였고 어이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을 것이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쓰러지지는 않았고 예정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7.
사실 위 공연이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공연이었자 열두발 상모 마지막 춤이 되고 말았다. 저 광주를 피로 물들인 80년 5월을 거치면서 대학 내에서 축전 자체가 사라져 버렸고 81년 역시나 그런 분위기에서 지나갔기에 졸업 때까지 결국 다시 열두발을 돌릴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88년 결혼하여서 아버님을 모시고 시골 내려가서 살자고 하여 그 당시 고양군 벽제읍 설문리라는 곳으로 이주하였더니 한 두 분 풍물을 치는 분이 있어서 가끔 마을에서 한 번씩 칠 때 그래도 내 실력 정도로 꽹가리를 잡을 수 있었으니 다 그 모든 것이 옛적 서울농대 풍물패 농악반에서 조금이나마 연습한 결과라 할 것이다.
8.
1979년에 생긴 탈춤연합이란 모임이 있었다. 각 대학 탈패들이 모여서 함께 연습도 하고 공연도 하고 공부도 하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는 범 대학 차원의 연합모임인 셈이다. 이 때 슬그머니 농악반 자격으로 들어가서 함께 마시고 즐겼던 친구들이 결국 평생의 술판 동지들이 되고 말았으니, 이 또한 풍물이 나에게 맺어준 인연이라 할 것이다.
9.
[축시] 풍물패 두레 40년을 축하하면서
솟대를 하나 세웁니다
한반도의 산천을 닮은 해맑은 눈동자들
하늘의 정기를 받고 땅의 기운을 북돋아
신명나게 풍물을 앞세우며 마을을 돕니다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고
어느덧 벌써 삼십년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간절한 바람마저 함께 흘렀습니다
새벽 차디찬 정한수
정성들여 고이 길어 바치시는
우리 땅 엄마들 마음으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근현대사를 지키며 살아오신
조선선비의 대쪽 기상을 지닌
우리 땅 아버지들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농투산이들 흙 묻은 거친 손들
가진 것 없이 두 주먹 하나로
땅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오신
우리땅 우리 민초들의 마음으로,
솟대를 세우면
다시 솟아나는 솟대 솟대들
그것은 이 땅의 염원이었고 꿈이었고
바람이었습니다
희망과 절망을 함께하고
어둠과 밝음도 함께하며
무엇보다 더 중요하였던
우리들의 우정 속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슬픔과 기쁨이었습니다
農者天下之大本 農者天下之大本
농기 영기가 들리고
상쇠가 앞을 서면 따르는 치배들이
잡색과 어울려 함께 엉키면
온갖 빠른 가락 느린 가락
빠른 가락이 휘몰아치면
능청능청 굿거리장단이 어우러져
마을은 금새 판굿이 되고
마당은 온통 굿판이 되고
열두발 상모, 상모가 돈다
어지럽게 휘감으며
양사위 겹사위
태양의 자손을 자부하였던
하늘의 자식들이
함께 하는 염원들
다시 솟대 하나 세웁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도 십년 또 이십년
그 이후로도 세세년년
함께 더불고 함께 뒹굴며
솟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희망을 세우며 나갈 수 있도록
술령수~~~예이~~~
각각 치배 다 준비 되었으면~~얼씨구
일초 이초 단 삼초 후에~~지화자
행군하랍시네~~~~예이~~~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김장욱 서울농대 두레풍물패 78학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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