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부터의 진실' 5·18 조사는 계속된다
사죄는 없었다. 11월23일 오전, 전두환씨의 사망 소식을 자택 밖 기자들에게 알리던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담당 비서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자들이 ‘전씨가 숨지기 전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남긴 사과는 없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하자 〈전두환 회고록〉 집필자이기도 한 그가 기자들을 꾸짖듯 말했다. “지금 질문하는 뜻이, 당시에 전 대통령이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배후에서 사실상 지휘했고 그래서 사실상 발포 명령도 한 거 아니냐, 거기에 대해서 사죄하라 그런 뜻 아닙니까? 그런데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나한테 질문하는 사람들 기자 아닙니까? 기자가 기사 쓸 때도 육하원칙에 따라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당시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몇 날 며칠 어디에서 어떤 부대를 어떻게 지휘했고 누구누구한테 어떻게 발포 명령을 했다는 것을 적시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묻고 거기에 대해서 사죄하라고 해야지.”
그의 등 뒤로 전두환씨의 연희동 자택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수많은 기습시위와 피해자들의 절규에도 열린 적 없는 문이었다. 대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에 서서 기자들을 내려다보던 민 전 비서관은 ‘훈계’를 이어갔다. “광주 피해자들이든 유족에 대해서 사죄할 뜻이 없느냐 하는 것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전 대통령이 (해왔다). 바로 오늘 11월23일이 33년 전에 백담사 가시던 날인데 그날 여기서도 성명에서 발표하시고. 피해자들한테 여러 가지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셨고 광주 청문회 때도 말씀하셨고 여러 차례 그런 말씀 하셨어요. 지금 여러분들 그런 사실을 모르니까 자꾸 사죄하라고 하는데, 광주 피해자들 유가족들에 대한 그런 말씀은 이미 하신 바가 있고. 단지 지금 사죄하라는 거는 아까 얘기했지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요.”
전두환씨가 5·18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이미 여러 차례 사죄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일까. 전씨가 5·18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건 사실이지만, 총기 발포 명령이나 사상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적은 없다. 어떤 행위에 대한 사죄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단순한 유감 표명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태는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이 불행한 사태의 진상과 성격은 국회청문회 등을 통해서 밝혀질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그 후 대통령이 된 뒤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던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1988년 11월23일, 백담사로 떠나기 전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중).”
그러나 국회 청문회에서도, 대법원에서도 ‘불행한 사태의 진상과 성격’은 규명되지 못했다. 1997년 4월 전두환씨는 반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았으나 총기 발포와 사상자 발생에 대한 책임은 피해갔다. 그해 12월 특별사면을 받아 감옥을 나온 전씨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 삼아 자신은 5·18과는 관계가 없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16년 〈신동아〉 인터뷰에 함께 참여한 그의 아내 이순자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5·18 재판에서 ‘광주에서 발포 명령자는 없었다’고 분명하게 결과가 나와 그나마 학살자라는 누명은 벗었어요.”
‘내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기꺼이 욕을 먹겠다’는 태도는 자기모순적인 발언을 낳기도 했다. 2003년 2월16일 SBS와 인터뷰에서 전두환씨는 5·18을 내란으로 규정하는 생각에 변함이 없음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후 내가 대통령이 됐으니까 내가 광주사태를 진압한 사람으로 몰고 가더라고. 재판할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중략) 그래서 광주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보고 ‘광주에 가서 분신자살을 하라 그러면 해결된다’ 그러면 내가 가서 분신자살할 수가 있지. 근데 분신자살해도 해결이 안 돼. 그 사람들의 응어리, 감정이 있어서 그게 안 되는 거야.” 1980년 5월 광주가 자신의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진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그조차 내가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는 종전의 변명을 거듭한 것이다.
그의 사망으로 조사 속도 빨라질 수도
이제 당사자 전두환씨가 사망했으니 5·18에 대한 그의 책임은 영영 밝혀낼 수 없는 걸까.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당시 계엄군을 포함해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 2만여 명을 전수조사하며 ‘아래로부터의 진실’을 맞춰가고 있다(〈시사IN〉 제714호 “5·18 계엄군의 눈물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아’” 기사 참조). 5·18조사위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전씨의 책임을 밝혀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본다. 박진언 5·18조사위 대외협력담당관은 “애초에 조사위의 목표가 군인 한명 한명의 진술과 기록을 모아 올라가며 최종적으로는 그 자체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찾는 것이다. 전두환씨는 사망했지만, 계엄군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일관되게 나온 진술과 기록이 있기 때문에 결국 책임자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5·18조사위는 지난 9월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씨를 포함해 노태우·이희성·황영시·정호용에게 대면조사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박진언 대외협력담당관은 “그동안 어느 정도 증거가 모였기 때문에 조사위에서 중요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노태우·전두환씨는 건강을 이유로 조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다 사망했다. 이희성·황영시씨는 한 차례 대면조사를 받았다. 조사위는 조만간 정호용씨도 대면조사를 할 계획이다.
5·18조사위 측은 전두환씨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오히려 조사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전씨가 생존해 있을 때는 당시의 기억을 털어놓고 싶어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23일 전두환씨 사망 당일, 5·18조사위는 ‘조사대상자 전두환씨 사망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한 쪽짜리 짤막한 보도자료를 냈다. “우리 위원회는 전두환씨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엄정한 조사를 지속해나갈 것입니다. 아울러 신군부 핵심 인물들은 더 늦기 전에 국민과 역사 앞에 진실을 고백할 것을 촉구합니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