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잊혀진 사람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1. 11. 2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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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 공약은 본인의 전격적인 입장 변경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퓰리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기본소득 공약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현재의 지지율 국면에서 포퓰리즘의 아이콘이 자신의 정치적 주무기를 스스로 버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난 9월 15일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제3차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지급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3차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은 정부의 5차 재난지원금(코로나19 상생 국민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된 소득 상위 12%의 도민 약 253만7천명에게 1인당 25만원씩 지급하는 것이다./연합뉴스

포퓰리즘에는 중독성이 있다. 정치가든, 유권자든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포퓰리즘은 전염성도 강하다. 누군가에 의해 한번 시동이 걸리면 정치판 전체를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 된다. 문제는 비용이다. 대국민 선심은 자비(自費)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소속 정당의 금고를 여는 것도 아니다. 포퓰리즘에 소요되는 예산은 국가 재정에서 나온다. 그것이 국가 부채를 동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국가 재정은 현재 국민이 내는 돈이며, 국가 부채는 앞으로 국민이 갚아야 할 빚이다.

포퓰리즘은 어쩌면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정책이 비용 부담과 관련하여 일종의 괴물처럼 변해버린 경우다. 가령 A라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X를 알게 되었다고 치자. 이에 대해 A는 B와 이야기를 나누고 X를 돕기 위한 법을 함께 제정한다고 치자. 그리고 그 법은 논의에 동참하지 않은 C가 X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시한다고 치자. 여기서 A와 B가 X를 돕기로 한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C를 개입시킨 점이다. 왜냐하면 C는 X를 돕는 일에 비용만 댈 뿐, 존재감이나 기여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883년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섬너(William Sumner)는 C를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 불렀다. 그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고자 했던 진보주의자들이 이념적 열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에게 사회적 프로젝트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C는 열심히 일하고 투표하고 기도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는 존재다. A와 B가 정부, 정당, 노조, 이익단체 등 조직화된 집단이라면 C는 이들 틈에 가려진 삶의 개별적 주체들이다. 섬너가 볼 때 C는 사실 잊혔다기보다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잊힌 사람이라는 표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20세기 전반 대공황 시기였다. 뉴딜을 처방으로 제시한 진보주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잊힌 사람’을 위한 정치를 약속했다. 섬너의 이론에 따르면 C가 잊힌 사람인데, 루스벨트는 이를 X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설정한 잊힌 사람은 빈곤층이나 고령자, 농민, 노동자 등 이른바 ‘민중’ 유권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을 기록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끝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장기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애미티 슐래스, ‘잊혀진 사람’). 퍼붓기식 국가 재정 확대가 심각한 사회·도덕적 부작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루스벨트식(式) 잊힌 사람이 아닌, 섬너의 원래 잊힌 사람들은 뉴딜로부터 혜택을 받기는커녕 대형 국책 사업과 복지 확대에 필요한 거대 예산만 세금으로 떠안았다. 이들 순진한 국민은 공공 구호에 의존하기보다 혼자 힘으로 살고자 노력하면서 경제 위기의 극복만 조용히 기다렸다. 사실상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물론 루스벨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무조건 포퓰리즘으로 매도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음수사원(飮水思源), 곧 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하듯 포퓰리즘의 재원에 대한 성찰은 최소한의 예의이자 염치다. 선거판이 나랏돈을 펑펑 쓰는 매표(買票) 경연장으로 타락한 작금의 한국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포퓰리즘의 선동자나 직접 수혜자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피와 땀을 잊고 살거나 모른 체한다. 그 결과, 성실한 노동과 정직한 납세를 보람으로 아는 선량한 국민들은 포퓰리즘의 호구(虎口)나 다름없다. 알짜 세원(稅源)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인과 자산가라면 무턱대고 죄인 취급하는 사회다.

포퓰리즘의 폭주를 완전히 멈추려면 막후의 잊힌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나마 세상이 굴러가고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은 이들 진짜 애국자 덕분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내년 대선은 여야의 선택을 넘어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괴물을 퇴출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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