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오래 아주 오래
[경향신문]
나비는 날개가 무거워 바위에 쉬어 앉았다
평생 꿀 따던 꽃대궁처럼 어지럽지 않았다
등판에 밴 땀내도 싫지 않았다
달팽이 껍질에 무서리 솟던 날
마지막 빈 꽃 듣던 바로 그 다음날
바람은 낙엽인 줄 알고 나비의 어깨를 걷어
갔다
나비의 몸은 삭은 부엽에 떨어져
제 주위의 지층을 오래 아주 오래 굳혀갔고
바위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제 몸을 헐어
가벼워졌다
지금 저 바위는 그 나비다
지금 저 나비는 그 바위다
봐라, 나비 위에 갓 깬 바위가 앉아 쉬고 있다
반칠환(1964~)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앨범 하나가 떠올랐다. 1988년 발매된 그룹 동서남북의 <아주 오래된 기억과의 조우>다. ‘아주 오래된’이나 ‘나비’ ‘바위’ 등의 시어로 인한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겠지만 기억의 저편에 고이 잠들어 있던 노래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참 좋아했던 노래들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 듣는다. ‘하나가 되어요’ ‘나비’ ‘모래 위에 핀 꽃’ 등은 지금 들어도 올드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신선하다.
발표한 지 20년이 넘은 이 시도 신선하다. 허공을 날다 지친 나비가 바위 위에 앉아 쉰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비도, 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위도 고행이다. 무서리 내릴 때까지 나비는 날아가지 않는다. 오랜 수행에 해탈한 듯하다. “부엽에 떨어”진 나비의 몸은 주위를 “오래 아주 오래” 변화시킨다. 바위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몸이 가벼워진다. 마침내 나비와 바위는 하나가 된다. 서로 뒤바뀌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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