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박경리 [엄재식의 내 인생의 책 ①]
[경향신문]
소설 <토지>의 첫 문장은 ‘1897년의 한가위’로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하고도 24년도 전 추석이 펼쳐진다. 타작마당의 흥에 겨운 꽹과리 소리, 징 소리와 달리 최참판댁 사랑은 적막한 기운에 휩싸여 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도 삶의 소리와 색은 지켜보는 곳에 따라 달라진다.
가끔 뭔가 막혀 있고 답답한 기분이 들 때 토지 1권을 꺼내 펼친다. 120여 년 전의 평사리 풍경을 곱씹고,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마다 삶과 사회와 세상과 역사가 어떻게 굽이치고 흘러갈 수 있는지를 되새기게 된다.
<토지>는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근대역사를 아우르는 대하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굵직한 사건 자체보다 그 세상을 살아낸 이들이 그 사건을 통해 겪은, 삶의 변곡점마다 ‘떨림’들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주인공 최서희는 다섯 살에 마당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처음 등장해 격동의 세월을 살아낸다. 평사리에서 간도로, 간도에서 진주로 넘는 삶은 고단하면서도 치열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글로벌했다. 서희의 삶은 한국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이고, 세계사의 일부로 확장된다. 120년 전의 삶도 지금의 삶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얽힌다. <토지>가 엮어낸 삶은 한의 여정인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것들, 생명의 가치를 밝히려는 여정이었다.
박경리 선생은 1993년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내게 <토지>가 더 특별한 이유다.
엄재식 |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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