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밥 좀 줘. 엑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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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저녁 8시.
늘 거기, 엑시트를 찾은 거리 청소년이 배고픔에 머뭇거리지 않도록, 밥솥은 입구 바로 옆 자리를 잡았다.
엑시트를 향한 청소년들의 항의가 사무실에 전해졌다.
엑시트에서만큼은 그들에게 밥은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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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하어영 | 전국팀장
지난 12일 저녁 8시. 서울 신림사거리 봉림교에 밥 냄새가 퍼졌다. 20인분 영업용 밥솥이 열렸다. 건너편, 활동가 공기(별명)가 떡볶이를 뒤집었다. 인성, 제제, 마미, 방토 등 활동가들이 여느 때처럼 분주하다. 구백마흔다섯번째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엑시트’ 마지막 아웃리치가 시작됐다.
10년 전, 2011년 7월26일 버스가 봉림교 옆에 정차한 뒤 버스는 매주 그 자리였다. 설에도, 추석에도, 밥솥은 김을 뿜었다. 늘 거기, 엑시트를 찾은 거리 청소년이 배고픔에 머뭇거리지 않도록, 밥솥은 입구 바로 옆 자리를 잡았다. 움푹진푹 찌그러진 밥통 속은 거리의 곡절로 채우고 비워졌다.
`늘 거기’가 쉬울 리 없다. 지난해 코로나19의 봄, 사회적 거리두기로 밥 나눔은 불법이 됐다. 전국 열세곳 공공기관 청소년 아웃리치(버스)가 멈춰 섰다. 쉼터도, 보호소도 마찬가지다. 피시방, 찜질방조차 불을 껐다. 아웃리치 중 유일하게 엑시트만 버텼다. 보수단체 광화문 집회가 벌어진 여름, 확진자 수가 폭증했다. 엑시트도 멈춰 섰다.
“밥 좀 줘.”
며칠이 지났을까. 엑시트를 향한 청소년들의 항의가 사무실에 전해졌다. 3만1918명, 10년 동안 엑시트를 거쳐간 거리 청소년 수만큼 외침은 힘이 셌다. 엑시트에서만큼은 그들에게 밥은 권리였다. 엑시트는 외려 고무됐다. 봉림교 옆으로 솥 대신 도시락을 들고 나섰다. 4주 만이었다. 버스 대신 천막을 세웠다. 밥심으로 밤샘 배달에 나서는 라이더, 일주일에 사흘 쉬지 않고 스리잡을 뛰는 알바생, 밥보다 충전기, 옷·생리대·담요·즉석밥·세면도구 등을 알뜰히 챙겨 가는 어린 집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천막 가림막을 젖히고 들어섰다. 10월, 이전 3년을 따져 가장 많은 청소년이 오갔다. 코로나19가 차별, 불화, 갈등, 반목까지 삼킬 리 없었으니, 환대와 연대를 구하는 청소년의 손길은 여전했다.
밤 10시께, 입구 안내를 잠시 맡았다. 들어서는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메뉴판도 함께다. 말이 메뉴판이지, 원하는 바를 적는 쪽지다. 밥, 법률 지원, 속옷, 수다 등 10년 누적돼온 ‘필요’ 목록이 빼곡하다. 기다리던 활동가가 청소년을 낚아채듯 이끌었다. 끝이라지만, 특별한 이벤트는 없다. 천막을 접고 버스를 물릴 때까지 거리 청소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자는 게 엑시트의 다짐이었다. 엑시트를 아는 이들에게 ‘마지막’은 오래된 현실이었다. 2020년, 대기업 등 후원이 끊겼다. 코로나19도 넘어섰지만 더 무서운 건 돈이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화상회의 플랫폼 ‘줌’으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다. 지난 26일 엑시터(엑시트 이용 청소년), 활동가 등이 모였다.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엑시트와 청소년자립팸 이상한 나라, 그 10년의 기록 <비상구에서 지은 누구나의 집>’ 출판기념회. 그날 160여명이 모인 화면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책 속 고백을 들었다.
“엑시트 없어지면 아쉽겠지. 하지만 개별 삶을 지원한다고 해서 전체 삶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없어. 엑시트 하나 있다고 이 사람들의 삶이 나아질 게 아니야. 나는 확실히 좀 다르게 접근해야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윤경 활동가)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그도 안다. 당장, 엑시트가 떠난 현장, 배고픔은 현실이다. 잊고 살지만, 우리는 모두 청소년이(었)다. 밥은 굶지 말아야 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이다.
“나를 자꾸 살려줘요. 나를 매번 살리는 생명의 은인들이에요.”
10년차 엑시터 ‘제로’(별명)의 말처럼 엑시트는 누군가의 삶에 절실했고, 절실할 텐데…. 2만명(경찰 추산, 연인원)인지, 27만명(여성가족부 추산)인지, 정부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하는(않는) 청소년들이 지금도 곳곳에 있다. 구청도, 시청도, 보건복지부도 채우지 못하던 엑시트의 빈자리. 누가 채워야 할까.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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