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소 안 외국인들과 '환대의 권리'

한겨레 2021. 11. 28. 19: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1795년 칸트는 전쟁이란 악을 끝내고 인류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이성적 해결책을 작은 소책자에 담아냈다. 바로 <영구평화론>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런 세계시민적 태도를 ‘환대’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런 환대가 인류애에서 나온 태도가 아니라 이성이 강제하는 ‘권리’라고 선언한다. 더하여 ‘환대’의 권리가 보장될 때에만 “우리가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향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렇게 ‘적대 없이 머물다 갈’ 환대의 권리는 국가 간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지기 시작한 근대세계에서 인류의 권리와 국가의 권리를 잘 절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환대의 권리’를 새삼 언급하는 이유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때문이다. 지난 9월 이곳에서 난민신청 중인 모로코 국적의 한 남성이 불법적으로 독방에 구금된 채 일명 ‘새우꺾기’ 고문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갑을 사용해 등 뒤로 손목을 포박하고, 포승줄을 사용해 발목을 포박한 다음, 배를 바닥에 댄 채로 등 뒤로 손목 포박과 발목 포박을 연결해 사지를 새우등처럼 굽혀놓은 채 홀로 감금해놓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게는 20분, 길게는 3시간, 하루는 4시간24분 동안 행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호소는 피해자의 난동과 자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난동과 자해가 있었다 한들 새우꺾기 같은 고문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나 행해지던 일이다. 처음엔 ‘보호장비 사용은 보호외국인의 자해 방지와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해명서를 내놓았던 법무부가 종내는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재발대책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특히 보호소에 있는 대다수 외국인들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구금이 되어 있는 경우인데, 이들 대부분이 체류 기간이 지난 미등록 이주민이기 때문이다. 특히 난민신청 기간을 놓친 이들은 ‘언제일지 모를’ 송환 시기까지 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기한 구금이 가능하다. 이사이 이들의 ‘생살여탈권’은 자신이 떠나야만 했던 조국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주길 간절히 원하는 국가로 사실상 귀속된다.

이번에 난동과 자해를 벌였다는 이유로 ‘새우꺾기’ 고문을 당한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난민신청 기간을 놓치고 지난 3월부터 계속 보호소에 장기간 수용돼 있었다. 문제는 이 보호소의 상황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문피해자는 극심한 치통에 시달렸지만 보호소 내부에서는 제대로 된 진료를 볼 수가 없었다. 외국인보호소에선 1명의 의사가 적게는 100명, 많게는 300~400명의 건강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비 부담’이 원칙인 외부 진료를 요청했지만 이마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난동을 부리고 나서야 겨우 병원에 갈 수 있었지만 대가는 알려진 바와 같다.

이뿐만 아니라 외국인보호소에 수용된 이들은 쇠창살이 있는 좁은 방에서 여러명이 오래 갇혀 지내고, 내부에서도 이동이 제한되고, 식사도 열악한데다 운동 시간마저 너무 부족해서 신체적·정신적 질병을 달고 사는 경우가 흔하다. 소화불량, 피부염은 기본이고 불면증, 우울증, 자살충동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많지만 이를 보살필 인력이 없다. 게다가 이곳에선 죄수복과 유사한 보호복이라는 옷을 착용하고 지내는데, 병원 진료나 법원 출석을 할 때도 이 보호복을 입고 수갑을 차고 나가야만 한다. 사실상 죄수처럼 취급을 받지만, 시민권이 없는 탓에 기본적인 인권도 보호받지 못하는 죄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 이방인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은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행위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권리가 아니라 의사를 밝힐 권리를 빼앗긴다. 대체로 불의가, 또는 축복과 저주가 우연에 따라 그들에게 내린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했고, 앞으로 할 것인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세계시민의 덕목으로서 ‘환대’는 이방인들을 ‘손님으로 즐겁게 해주자는 것’이 아니다. 찾아온 이들을 ‘적대 없이 최소한 안전하게 머무르게 해주자는 것’이다. 갈 곳 없는 자의 생살여탈권을 쥔 ‘갑’이 아니라, 그저 최소한의 친절이라도 갖춘 이웃이 되자는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