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24] 천왕봉 건강검진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1. 11. 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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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대는 히말라야 자락이 내려온 네팔의 산골 동네 정취가 난다. 산청군 단성면의 배산서당(倍山書堂). 이 서당 일대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 처음 재배를 한 동네로 유명하다. 서당이 자리 잡은 터에 대한 합천 이씨들의 자부심도 상당하였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맥이 한 군데도 끊기지 않고, 강물도 건너지 않고, 순전히 산의 맥으로만 내려와 최종적으로 에너지가 뭉쳐 결국(結局)을 이룬 지점’이라는 자부심이었다. 필자가 듣기에는 ‘지리산 천왕봉의 정기를 여기서 빨대 꽂고 끌어당길 수 있는 터’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서당 멤버의 91세 된 아버지가 있었다. 고령의 이 아버지와 70·80대 후배들 4명과 함께 1915m 높이의 천왕봉을 올라갔다 왔다는 무용담도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91세 노인이 천왕봉이라니! 천왕봉 등산이야말로 확실한 건강검진이라는 말이었다. 2009년 대한일보 기사를 검색해 보니까 91세 이병덕옹과 80대 2명, 70대 2명이 같이 핫바지에 나무 지팡이를 짚고 9시간 만에 천왕봉을 올라갔다 내려왔다는 기사가 있었다. 죽기 전에 한번 가보자는 의욕을 실천한 것이다. 나도 희망이 있구나!

부산교통 대표인 조옥환옹은 1932년생이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이 영감님도 올해 4월에 천왕봉을 올랐다. 왕복 8시간 정도. 순두류에서 출발하여 천왕봉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만 걸린 시간은 4시간 10분. 작년 기록보다 20분 늦었다. 작년에는 재작년 기록보다 15분을 단축하여서 기분이 좋았었다. 법계사에서 천왕봉 올라가는 중간 지점이 제일 헉헉거린다고 한다.

매년 천왕봉을 오르는 일은 남명학파의 전통이었다. 퇴계가 청량산을 사랑하였다면 남명 조식 선생은 천왕봉을 사랑하였다. 남명이 인생 후반부에 산청군 덕산에 살았던 이유도 이곳이 천왕봉을 직통으로 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남명은 생전에 천왕봉을 12번이나 올라갔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남명의 12대 후손인 조옥환은 사업해서 돈만 생기면 남명학회 논문 지원과 운영 자금으로 댔다. 45년 동안 400억원을 썼다. 한 번에 1000억원은 낼 수 있지만 수십년 동안 꾸준히 돈을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남명의 수제자가 수우당 최영경인데, 수우당의 13대 직손인 최구식(62·선비문화연구원장)은 ‘천왕봉 어른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남명과 수우당을 비롯한 남명학파 어른들의 혼령이 지금도 천왕봉에 계신다고 본인은 믿는다는 것이었다. 천왕봉은 인생의 허무에 맞서는 정신과 기백을 기르는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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