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압력에 잇달아 훼손된 조선왕릉..'장릉 앞 아파트' 운명은
종묘 옆 건물 12년 심의 거쳐 최대 67m 낮아져.."관계기관 머리 맞대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김포 장릉(章陵) 앞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 문화재 당국 허가 없이 지어져 논란에 휘말린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아파트의 운명을 결정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앞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과 건설사들은 지난 14일 간담회에서 조속한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17일 아파트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청와대 국민청원에 "세계문화유산 가치를 유지하며 합리적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원론적 입장을 내놨다.
2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른바 '왕릉뷰 아파트'로도 불리는 이번 사안은 대방건설, 대광이엔씨(시공 대광건영), 제이에스글로벌(시공 금성백조)이 김포 장릉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 고층 아파트를 세우기 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아 불거졌다.
문화재청은 2017년 1월 관보에 실은 고시에서 김포 장릉 반경 500m 안에서 높이 20m가 넘는 건물을 지을 경우 개별적으로 현상변경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현상변경은 문화재와 주변 환경의 현재 상태를 바꾸는 행위를 뜻한다.
문화재청은 고시 등을 근거로 2019년 착공한 검단신도시 아파트 44개 동 중 19개 동이 현상변경 심의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건설사와 인천 서구청은 해당 고시가 인천시를 제외한 김포시에만 고지됐고, 2014년 이미 토지에 대한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 문제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장릉 앞 아파트' 사태가 수십 년간 개발 압력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고 축소된 조선왕릉 수난사의 일면이라고 보고 있다.
1970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후에도 조선왕릉 주변의 넓은 부지를 경제적 관점에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삼릉·태강릉·선정릉 구역 축소…"김포 장릉은 전망 중요"
조선왕릉은 개성에 있는 2기와 단종 무덤인 영월 장릉(莊陵)을 제외한 39기가 수도권에 있다. 그중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 영릉(寧陵)을 뺀 나머지는 건물이 밀집한 서울·남양주·구리·양주·고양·파주·김포·화성에 있다. 조선왕실은 도성에서 약 40㎞ 안에 왕릉을 두도록 했다.
조운연 전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장이 상명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능역(陵域), 즉 능의 구역이 온전히 보존된 조선왕릉은 많지 않다.
조 전 과장은 "조선왕릉은 광활한 능역과 정부 소유 땅이라는 사실로 인해 국가기관이 점유하며 훼손이 이뤄졌다"며 "조선왕릉 능역 면적을 1960년대와 비교하면 25%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고양 서삼릉은 부지가 골프장과 농협 등에 매각되면서 능역이 7곳으로 분리됐고, 서울 태강릉은 선수촌과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문정왕후 무덤인 태릉 좌우 구역이 원형을 잃었다. 서울 의릉에는 중앙정보부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서울 강남구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녹색 섬처럼 변했다. 선정릉 사례를 들어 김포 장릉 앞 아파트 건설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문화재계에서는 오히려 선정릉을 조선왕릉 훼손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조 전 과장은 "선정릉은 강남 개발로 인해 선릉과 정릉의 금천교, 선릉의 우백호와 정릉의 좌청룡, 선릉의 연지(蓮池) 등이 훼손됐다"며 "도시 계획에 따라 능역은 자로 잰 듯하게 일직선으로 잘려 나갔다"고 지적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의 무덤인 김포 장릉도 1960년에는 능역이 훨씬 넓었다.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 작업에 참여한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2010년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김포 장릉을 분석한 논문에서 "장릉 능역에 군부대, 대학, 산업단지 등이 세워지면서 이미지가 훼손됐다"며 "장릉은 능침 전망 경관의 보존 가치가 높은 유산으로, 조산인 계양산의 시계(視界)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산은 풍수지리에서 용의 봉우리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골조가 완성된 검단신도시 아파트들로 인해 능침에서 계양산을 볼 수 없게 됐다.
향후 '문화재 경관 보존' 판단 기준 될 문화재위 결정
김포 장릉 앞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들이 문화재청 고시에 따라 현상변경 심의를 받았다면 설계안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주목할 만한 사례가 김포 장릉처럼 사적이자 세계유산인 종묘 인근 서울 종로구 예지동 85번지 일대에 들어설 건물이다.
종묘에서 약 170m 떨어진 이곳은 문화재위원회 현상변경 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종묘 중심 건물인 정전에서 보면 건물이 위로 노출돼 역사문화환경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서울은 보통 문화재로부터 100m 안쪽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정한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2009년 높이 122.3m인 36층 건물을 짓겠다고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듬해 높이 75m인 21층 건물 설계안이 조건부 가결로 통과됐지만, 2013년 시뮬레이션 내용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다시 심의를 받았다.
문화재위원회는 이후 여러 차례 '보류' 결론을 내린 끝에 지난 1월에야 "변경 계획에 대해 전문가 조언을 받아 추진하라"는 조건을 달아 허가를 내줬다. 변경된 안에 따르면 건물 높이는 청계천변이 71.9m, 종로변은 55m다. 12년에 걸친 심의를 통해 건물 높이가 최대 67m나 낮아진 것이다.
이 같은 잣대를 김포 장릉에 적용한다면 검단신도시 건설사들이 앞서 제안한 건물 색상과 일부 디자인 변경만으로는 심의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장릉과 아파트 사이에 키가 큰 나무를 심는 방안도 일찌감치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위원회가 종묘 옆 건물 안건을 다룰 때도 나무로 가리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검단신도시 아파트를 정상적으로 심의했다면 건물 층수가 상당히 낮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위원회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 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 심의를 다음 달에 열어 김포 장릉 안건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예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학계 관계자는 "문화재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향후 문화재 경관 보존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라며 "문화재를 지키고 입주민 피해도 줄일 묘안을 찾기 위해 관계기관이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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