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원인은 '냉장고 엄마'일까
지금도 떠올리는 즉시 입가에 ‘엄마 미소’가 고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첫아이가 아직 젖먹이이던 시절, 제 품에 안겨 배불리 먹고는 세상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던 순간입니다. 사람 얼굴 주변으로 광채가 나고 꽃이 피어나는 컴퓨터그래픽(CG)을 현실에서 그렇게 마주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하고, 너도 나도 서로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공기로 전해지며 모든 게 충만해지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순간의 밀도가 얼마나 짙은지, 아이가 자라면서 내 속을 뒤집어놓았던 그 모든 답답한 기억을 다 더해도, 단 몇 초간 그 교감의 농도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모두가 교감 능력을 타고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이런 교감의 기쁨을 저절로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교감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책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2021)를 본 뒤, 제게 주어진 충만함이 정말 행운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아기들은 교감하는 능력을 타고납니다. 하지만 모든 타고난 능력이 그렇듯, 어떤 아이에게는 이런 능력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1940년대 미국의 정신과 의사 레오 카너는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증례를 학계에 공식 보고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단지 타인과의 정서적 접촉에 장애가 있을 뿐, 그 밖의 신체적 건강이나 타고난 지적 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음을 말이죠.
이전까지 이런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조현병이나 발달장애로 치부됐기에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됐고, 심지어 버려지거나 심각한 학대를 받는 일도 많았습니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지닌 아동의 삶을 더 지속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연장시키는 일이므로, 이들에게 고통 없는 ‘안락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논문이 정신의학 학회지에 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논문 역시 줄줄이 실렸지만, 애초에 이런 논문의 게재가 허용됐다는 것 자체가 서늘합니다.
보통 아이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아이가 삶을 이어나갈 가치가 없다고 파악하던 시절에, 카너는 다양한 증상의 뒤편에 숨겨진 ‘교감하지 못함’이라는 진짜 이유를 찾아낸 것이죠. 그는 이런 아이들에게 부여될 ‘정서적 접촉에 의한 자폐적 장애’라는 진단명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고 자신 있게 떠들었음에도, 다른 신체적 기능에 문제가 없어도 단지 남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준 셈입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일 뿐
어떤 증상이 하나의 장애로 인식되고 이를 사회가 받아들이는 과정은 늘 수월하진 않지요. 자폐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질병이 명명되면 원인을 궁금해합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가 수월해지고 적어도 집중 공략해야 할 지점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자폐증이란 인간이 지닌 교감력의 다양한 연속선상에서 극단 쪽에 치우친 일종의 스펙트럼 장애이며, 뇌가 세상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표현형이라는 것을 압니다. 원인이 되는 병원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잘못해서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명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비난의 화살을 대개 사회적 약자, 다시 말해 마음껏 비난해도 대응하기 어려운 약한 이들에게 돌리곤 합니다. 근대 이전 흉작이나 돌림병의 원인을 마녀에게로 돌리고, 20세기 초 나치가 독일 경제 몰락의 원흉으로 유대인을 지목한 것이 대표적이죠. 마녀로 몰린 이들의 절대다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보호자 없이 혼자 사는 여성이었고, 유대인은 예수를 배신한 이들의 후예라는 원죄에 나라조차 없는 이방인 집단이었죠.
자폐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폐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은 매년 태어났지만, 이들이 이렇게 태어나야 할 결정적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자 또 누군가는 아주 편리하게도 비난의 화살을 또다시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돌립니다. 이 경우는,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자폐증을 가진 아이는 대개 태어날 때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뭔가 다른 아이들과 다름을 확실히 인정하는 건, 대개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입니다. 단지 예민해서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부모에게조차 곁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천, 수만 번 겪어보고서야 말이죠.
태어날 때는 별 이상이 없었던 아이가 자라니 이상을 보인다? 이는 원인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라고 쉽게 의심케 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갓난아이는 아니지만 아직 사회적 관계 속에 편입될 나이는 아닙니다. 그럼 누가 원인일까요? 이 아이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의 작은 세상에서 절대적인 인물, 바로 엄마입니다. 이른바 ‘냉장고 엄마’라 불릴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고 매몰찬 엄마가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아서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것이죠.
절대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엄마들
누군가의 ‘뇌피셜’에서 시작됐을 것만 같은 이 엉성한 추측은, 어쩐 일인지 점차 가지를 치고 뿌리를 내리며 점점 확고한 성벽이 돼갑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자폐증 아이를 돌보는 건 그렇지 않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이었음에도, 이를 참고 견뎌내는 엄마가 모든 불행의 원흉이라니요. 아무리 봐도 이 엄마는 다른 엄마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이쯤 되면 무너질 법도 한데 ‘냉장고 엄마’ 프레임은 얼음처럼 굳건해서, 이 엄마들의 의지와 의식과는 별개로 이들의 무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그리하여 자폐증 아이를 돌보느라 가뜩이나 지친 엄마는, 마치 중세 마녀 재판정에 선 이의 심정으로, 자신이 어떤 순간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정서적 거부감을 느꼈는지 곱씹어 찾아내 고백하며 죄책감과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어야 했지요. 비유가 아니라, 이는 진짜 마녀재판이었습니다. 단지 피냄새가 즐비한 고문실에서 언제든 그들의 목에 밧줄을 매달 준비를 하는 심판관 앞이 아니라, 소독약 냄새가 떠도는 진료실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사회적 낙인을 찍으려 기다리는 의료인 앞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아무리 엄마들을 비난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폐 증상을 보이는 아이는 태어났고, 엄마가 아무리 진심으로 뉘우쳐도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더 이상한 것은 ‘냉장고 엄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얼려서 망가뜨린’ 냉혹한 엄마로 비난받으면서도 절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며 사회가 아이들을 내치지 못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냈습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냉장고’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죄책감을 크게 느끼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교감할 수 있다면, 마녀사냥 대신
마녀사냥의 역사가 그토록 뿌리 깊은 건, 늘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약자 집단을 타자화하고 그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게 가장 손쉽고 편리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어리석어도, 수천 년이나 비슷한 방법을 써왔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희생만 남았다면 이제 그 방법은 폐기할 때가 한참 지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린 여전히 그 프레임을 사용합니다.
남자가/여자가/외국인이/타지인이/금수저가/흙수저가/베이비부머가/MZ세대가 등등 모든 타자를 원망의 프레임에 가둘 때, 우리가 그들을 마음껏 욕할 수 있는 건 그들과 내가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므로,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들과 나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일까요? 면밀히 따져보면, 그들은 가족이고 친구이고 동료이고 지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같은 인간임이 틀림없습니다. 아기가 교감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고, 교감의 능력이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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