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중국의 ASEAN 공세와 라오스에 울린 'BTS 환호'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중심가에 자리한 '라오 국가 문화 극장'. 모든 좌석을 꽉 채운 2천명 라오스 관객 앞에서 신성순 라오스 주재 한국 대사가 인사말을 시작합니다.
"올해는 K-pop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우리의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와!!!"
"우리의 방탄..."
"와!!!"
BTS, 방탄소년단을 언급할 때마다 관객들이 환호를 지르는 바람에 신 대사는 인사말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몇차례나 같은 일이 반복된 뒤에야 신 대사는 간신히 인사말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이어 치열한 예선을 뚫고 라오스 본선에 오른 12개 팀이 커버 댄스와 함께 K-pop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BTS는 물론 트와이스, 엑소, CLC 등 한국 아티스트들의 곡이 뮤직 비디오와 함께 차례로 나올 때마다 극장은 흥분으로 들떴습니다.
2018년 6월 현장에서 지켜 봤던 '창원 K-pop 월드 페스티벌' 라오스 예선의 모습입니다. K-pop 최전선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KBS와 외교부가 해마다 공동 주최하는 '창원 K-pop 월드 페스티벌'은 전 세계 100여 개 국에서 예선을 엽니다. 그 때마다 한국 문화원 등 예선 장소들은 K-pop으로 들뜹니다. 지역별 예선 우승팀 가운데 다시 엄선한 10여개 팀을 대한민국 창원으로 초대해 본선을 치릅니다.
■ 라오스 주요 건축물에 붙어 있는 "중국 정부의 선물"...아세안 곳곳 中 '일대일로' 진행중
그런데 라오스 예선이 열린 공연장의 정문 바로 옆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중국-라오스의 우의와 협력의 징표로 드리는 중국 정부와 인민의 선물".
중국의 원조로 지은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비엔티안 중심가를 둘러보니 같은 설명문이 붙어있는 대형 건축물이 여럿 보였습니다.
시내 도로에는 중국 기업 화웨이의 선전물도 많이 보였습니다. 일대일로가 중국 정부의 원조와 민영기업 진출이라는 투트랙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갑자기 라오스에서의 경험이 떠오른 이유는 2021년 11월 22일 열린 중국과 아세안(AEAN,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의 정상회의 때문입니다. 라오스는 아세안 회원국입니다. 중국과 아세안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전면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습니다.
■ 중국, 아세안과의 정상회의에서 경제 선물 보따리 공개..."전면적 전략 동반자 관계"
이 자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5년 동안 1500억 달러(약 178조원) 상당의 농산물 수입, 3년 간 15억 달러(약 1조 8천억원)의 개발 원조, 1,000개의 선진 응용 기술 제공, 청년 과학자 300명 방중 교류...
아세안은 최대 무역 대상국이기도 한 중국의 이같은 선물 공세를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감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필리핀 등 일부 국가는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공산주의 선전을 금지합니다. 최근 6.25 전쟁을 다룬 중국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의 상영을 불허했습니다.
그래도 아세안에 대한 중국의 물량 공세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미 일대일로 구상에 따라 중국과 동남아 전략 지역들을 잇는 철도,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구축 사업이 동남아 곳곳에서 진행중입니다.
■ 미국도 中 일대일로 견제 시작..."더 나은 세계 재건"
최근 미중간 전략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세안의 전략적 몸값은 더 올라가는 양상입니다 .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동남아 인근의 인도, 일본, 호주와의 '쿼드', 영국과 호주가 동참한 '오커스' 등 안보협의체를 잇달아 구축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입니다.
중국은 이를 돌파할 활로로 동남아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중 견제는 안보 측면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G7(선진 7개국) 정상들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저소득, 중소득 국가에 대규모 인프라 투자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계 재건'(Build Back Better World, B3W)이라는 프로젝트입니다.
수요 조사도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은 물론 아시아 국가들도 백악관의 담당자가 방문할 계획입니다.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대한 맞대응 성격입니다 .
시진핑 주석이 직접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에 나선 것은 이같은 경쟁 구도를 의식한 행보입니다. 정상회의를 통해 동남아 국가들을 계속 일대일로의 협력자로 잡아놓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실제 시 주석은 이번 정상회의 연설에서 '고품질의 일대일로 건설', '일대일로 국제산업협력 시범구 건설' 등 일대일로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 中 일대일로 공간에서 정작 라오스 청년 세대가 즐기는 문화는 K-pop
하여튼, 다시 라오스로 돌아옵니다. 현지 소식통은 'K-pop 월드 페스티벌' 예선 현장에 우리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라오스 공산당 고위간부가 참석했다고 귀뜸해줬습니다. 간부의 딸이 K-pop 팬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선을 치르는 공연장 밖에서는 한국 기업들과 현지 동포들이 상품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라오스 주요 인사들과 2,000명 넘는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국 상품과 문화 콘텐츠를 홍보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에 따라 예산을 투입해 라오스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극장을 세웠지만, 정작 그곳을 채우고 현지인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는 K-pop이었습니다.
한국 제품 진출의 우호적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자랑스러웠습니다.
한국 아티스트가 현장에 없어도 라오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한국 문화를 배우고 연마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 했습니다. 일부 예선 참가자들은 단순 K-pop 팬이 아니라 현지 무대나 방송에 출연하며 K-pop 전파자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라오스에서 K-pop 은 주류 대중문화는 아니었지만, 현지 상류층과 도시 청년층을 파고드는데 활용 가능한 전략적 자산이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한국은 건설 사업, 원조 등 다양한 측면에서 라오스의 메콩강 치수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문화 교류를 통한 우호적 분위기가 이같은 경제적 진출에도 도움이 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KBS World 시청자 93% "한국에 대한 느낌 좋아져"...아세안 협력에 '소프트 파워' 활용 기대
실제 KBS가 해외 시청자 6천여명 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실시한 '2020년 KBS World TV 시청자 만족도 조사'도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합니다.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해외 한류 채널인 KBS World TV를 시청한 뒤 "한국에 대한 느낌이 좋아졌다"(93%), "한국 제품에 대한 구매 의사가 높아졌다"(89%)고 답했습니다.
KBS World가 가장 강세를 보이는 지역도 아세안입니다. CNN이나 BBC World의 시청률을 크게 앞섭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일했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조지프 나이 교수는 '하드 파워(군사나 경제적 힘)'와 대비되는 '소프트 파워(문화와 외교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두 힘을 적절히 결합한 '스마트 파워'가 갈수록 더 중요하다고도 설명합니다.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 과정이나 아세안 접근법은 다분히 하드 파워를 떠올리게 합니다.
대한민국은 K-pop으로 상징되는 차별화된 소프트 파워와 신흥 선진국으로서의 하드 파워를 적절히 결합한 '스마트'한 전략으로 대 아세안 협력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기를 기대합니다.
조성원 기자 (sungwonc@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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