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에게 당한 후 내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2021. 11. 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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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적 손해배상④] 삼남매 아버지 박우성씨
"아내 집 나가고 자녀도 방황·가출..단란했던 가정 그리워"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26일 광주 남구 행암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박우성씨(71). 박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당한 피해로 단란한 가정을 잃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2021.11.27/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계엄군의 군홧발에 걷어차인 후 내 인생은 끝나버렸습니다. 아내도, 자식들도 우리들의 단란한 가정은 사라져 버렸죠."

26일 광주 남구 행암동의 한 아파트. 집안이 휑하다. 그 흔한 장롱이나 서랍 하나 없다. 이불 한 채만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다. 집주인 박우성씨(71)가 멋쩍은 듯 입을 연다.

"집 안이 좀 특이하죠? 엄청 휑하고. 원래는 장롱이랑 가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 뺐어요."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했다. 장기간 정신질환 치료제를 먹고 있지만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렸다. 어느 순간 자다가도 주변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잠결에 장롱이나 서랍을 깨부수는 거죠. 저도 잘 모르는데 눈 떠보면 가구가 깨져 있고…. 침실에서 하나씩 가구를 빼다가 이불 하나만 남게 된 거죠."

1980년 5월, 박씨는 광주 동구 수기동 현대극장 앞 한 이발소에서 이발사로 일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책임지는 삼남매의 아버지이자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의 삶이 뒤바뀐 건 그해 5월18일이었다. 박씨는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오전 11시쯤 박씨는 이발소 옆 한 주유소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서너명이 화염병을 제작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궁금증이 생긴 박씨는 이발소 여직원 2명 등과 함께 가게 앞으로 나가 팔짱을 끼고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돈 벌기도 바쁘고 애들 키워야 하고, 뭐 배운 것도 없으니 저는 나라 상황 같은 건 몰랐죠. 공수부대고 전두환이고, 소문도 못 들었다니까요. 데모하나? 불나는 건 아닌가 싶어 구경 간 거죠."

그때 어디선가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곤봉으로 화염병을 만들던 대학생들을 내리치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렸다. 머리가 터지고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은 가마니 싣듯이 차 위로 던져졌다.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니 미칠 것 같아요. 몸이 부르르 떨리고 이빨이 소리 나게 부딪혔다니까요."

대학생들을 폭행 후 연행한 군인들이 구경하던 박씨를 쳐다봤다. 그중 한 명이 손으로 박씨를 가리켰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두세명의 군인이 박씨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진압봉으로 박씨의 머리를 때리고 가차 없이 폭행했다. 얼굴에선 붉은 피가 흘러 눈 앞을 가렸다. 군인 한 명이 군홧발로 박씨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그 순간 처음 느끼는 극한 고통에 박씨는 두 손으로 낭심을 붙잡고 고꾸라졌다.

그때 당시 이발소 주인이었던 이정철씨가 달려와 "우리 박 선생 죽겠네"라며 가게 지하실로 우성씨를 대피시켰다.

"제 인상이 좀 세긴 하잖아요. 군인들이 저도 데모하는 사람인 줄 알았나 보죠. 아래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훅 느껴졌어요. 그곳이 띵띵 부어있었죠."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했다고 했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고통에 걸을 수도 뛸 수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 거실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폭행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으로 생업이던 이발사를 그만두게 됐다는 박우성씨. 그의 과거 모습과 당시 이발 부문으로 수상했던 메달. 2021.11.27/뉴스1

이튿날 계속되는 아픔에 인근 병원을 찾은 박씨는 15일간 입원 신세를 졌다. 치료를 받고 통증은 어느 정도 완화됐으나 후유증이 생겼다.

그 후 박씨와 가족들의 삶은 180도 뒤바뀌었다.

장시간 서서 일하면 통증이 올라왔다. 서서 일하는 시간보다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었다. 결국 생업이던 이발사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돈벌이가 사라지자 자신의 이발기술 하나만 믿고 시집을 왔던 아내와도 다툼이 시작됐다. 막둥이가 3살 때쯤 아내는 처음으로 집을 나갔다.

"남자 구실을 못하자 부부관계도 점점 틀어진 거죠. 삼남매는 엉엉 울어댔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며칠 뒤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화가 나기보다 마냥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아내의 가출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박씨는 10여년간 15번에 걸쳐 전국으로 아내를 찾아다녀야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삼남매를 못 키울 것 같아 아이들을 버리려고 고아원 앞에 찾아간 적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자식들을 놔두고 한 150m쯤이나 갔을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애들 버릴 용기라면 못 키우겠나' 싶어 펑펑 울며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집에 왔죠."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가정불화로 심각한 일탈을 겪었다. 온전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해서일까. 삼남매 모두 자주 가출을 했다.

아이들과 아내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집을 나가는 엄마에게 아이들은 정이 없었다. 엄마가 계속해서 집을 나가는 원인이 '아빠'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박씨와도 데면데면했다.

"낸들 맞고 싶어서 맞았습니까? 가만히 서 있다가 불구가 된 건데, 그런데도 애 엄마와 애들한테 미안하니까 맨날 용서해달라고 빌고 사정사정하며 데리고 온 거죠."

박씨는 가족 모두 캄캄한 지옥 같은 삶을 보냈다고 했다.

아이들은 아내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았다. 집 나간 아내를 경기도 의정부에서 찾아 데려오던 날. 몇 달 만에 아이들을 본 아내가 막내 아들에게 '우리 아들 많이 컸다'고 하자 당시 사춘기 중학생이던 막내는 '제가 왜 당신 아들이에요?'라고 까칠하게 쏘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둘째 아들이 친구들과 큰 싸움을 해 합의하러 경찰서에 다녀온 날, 아내가 또 집을 나갔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000년쯤 5·18 피해 보상금 신청을 해 국가로부터 800만원을 받았다. '내가 재기할 수 있을까?' 박씨는 다시 한번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식당을 차리려고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몇 년간 바깥일을 해보질 않았으니 엄두도 안 나고 물정도 몰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아 가게를 차리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사기를 당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언을 받던 지인에게 사기를 당했더라고요. 대출금과 국가 보상금, 부모님이 남겨놓은 재산까지 전부 날렸죠."

팍팍한 삶이 이어지면서 박씨는 '성불구'가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주위에 수소문했다. 폭포를 맞으면 회복될 수 있다는 말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7년간을 무등산으로 매일 폭포를 맞으러 다니기도 했다.

박씨는 5·18 당시 폭행당한 정신적 피해로 현재까지도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다. 정상적으로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5월만 되면 그런 상상력이 들어요. 그 계절이 오면 긴장하고 머리가 서는 느낌? 길 가다가 누굴 보면 다 군인 같아요. 한번 들이받아 봐? 뛰어 들어가 봐? 패볼까? 이런 폭력적인 상상도 수없이 하곤 해요."

박씨 집 거실에는 수많은 약통이 세워져 있었다. 정신질환 트라우마 약과 관절약, 협심증약, 성 기능 치료제 등 매 끼니 8개의 알약을 삼킨다.

"약을 이렇게 먹으면서도 버티는 이유요? 다 내 새끼들 때문이죠."

그 5·18 피해에 대한 정신적 손해배상금이 나온다면 자식들에게 못 해준 사랑을 늦게나마 전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막내아들을 장가보내고, 결혼한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손주들에게 용돈이라도 한번 줘보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다.

박씨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몇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자식들한테요, 어렸을 때 사랑을 못 줬습니다. 맨날 제 엄마랑 싸우고 찾으러 다니고, 여행 한번을 못갔죠. 남부럽지 않게 못 살게 한 것, 그게 가장 죄스러워요. 여행도 다니고 자식들도 자주 보고 늦게라도 우리 가족 다시 단란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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