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대 희생자' 딛고 선 우리 시대의 기득권 세력들

정의길 입력 2021. 11. 27. 09:06 수정 2021. 11. 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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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한겨레S] 커버스토리
장례식장에서 본 독재자의 잔재
지난 6월 ‘5·18 학살주범 전두환·노태우 청남대 동상 철거 국민행동’이 과거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던 청남대에서 전씨, 노씨에게 5·18 관련 사죄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청주/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저녁 나는 최근 회사를 떠난 동료와 술잔을 나누며 우리 세대 인생의 석양을 얘기하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기자로서의 나와 전두환’이라는 글을 쓰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그와는 말 한번 섞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나의 연배가 그의 시절을 가장 정면으로 경험한 세대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그가 등장할 때 나의 청춘이 시작됐고, 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나의 사회생활도 인생도 규정됐다.

독재에 저항하다 사라진 동료·친구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

‘춘래불사춘’의 시절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암살됐다. 다음날 아침 ‘박 대통령 유고’를 알리는 아침 신문을 마주했다. 1면 ‘뻬다백 통단’(신문 한 면 상단 전체를 채우는 검은 바탕 제목) 편집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곧 닥쳐올 불길함을 예고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거센 인상의 그는 시해 현장에서 사건 당사자들 사이에 오간 것으로 조사된 얘기들을 특유의 목소리로 전했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그까짓 놈들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차지철 경호실장)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암살 실행 직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나는 괜찮아….”(피격 뒤 박정희)

12·12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9개월 만인 19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그의 격한 영남 사투리로 전해진 이 표현들은 당시 우리 또래들에게 유행어가 됐다. 그해 12월12일엔 군부 실세 전두환·노태우 주도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고3이던 우리는 이 사태로, 당시 대입 본시험에 앞서 자격시험 격으로 치러지던 예비고사가 연기될지 갑론을박했다. 나라 전체가 안개에 싸였다. 이듬해 봄엔 ‘춘래불사춘’(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는 말이 대중화됐다.

대학가에서 그의 이름은 단두대에 서야 할 인물이라는 뜻으로 ‘전두한’(剪頭漢)으로 바꿔 불렸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유혈 진압의 예고였을까? 당시 계엄사령관은 ‘광주의 폭도’들에게 “군은 자위권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라고 위협했다. 우리는 발만 동동 굴렀고, 그사이 광주에서는 피가 흘렀다.

대형 강의실 지정좌석에서 옆에 앉던 친구는 학내 시위에서 여학생이 ‘짭새’(경찰)에 연행되는 것을 저지하다가 강제 징집됐다. 그는 반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학내로 침입한 사복경찰에 맞서 학생회관 3층 창문에 매달려 시위하던 여학생은 수직 낙하했다. 오랫동안 반신불수가 됐다. 그럼에도 도서관과 학생회관 창문에 밧줄을 걸고 매달려 곡예하듯 시위하는 학생들은 줄을 이었다. 친구들은 감옥 아니면 ‘현장’으로 사라졌다. 나 같은 이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아니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이뤘지만, 전두환 시대 거치며 기득권체제 돼

끌려갔던 남영동 분실 이미 ‘만실’

<전환시대의 논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나서, 저자인 리영희, 송건호처럼 기자가 되고 싶었던 청춘이었다. 고맙게도 나를 받아준 곳은 해직기자들이 만들던 ‘불법간행물’ <말>지였다. 경찰이 노동운동가를 붙잡은 뒤, 성고문하며 거짓 진술을 강요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운동권이 성을 혁명도구화한 사건”으로 보도되고, 건국대에서 대형 시위로 학생들이 1200명 넘게 구속되던 때였다.

선배 기자들이 쉬쉬하며 진행하던 일이 있었다. 정권이 언론에 강제로 내려보내던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뉴스의 방향과 논조, 기사의 크기를 ‘권고’하는 그 보도지침은 매일 각 신문사 편집부장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비밀이랄 것도 없던 ‘보도지침’을 기사화하자, 특종이 됐다. 선배들은 정부의 치부를 드러낸 ‘대가’로 잠수를 탔고, 심부름하던 나 역시 몸을 숨겨야 했다. 혐의는 국가기밀 누설이었다. 정부는 보도지침 내용 가운데 국방 관련 정보를 누설했다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희극이었다.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다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6월 항쟁 34주년을 맞은 6월10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박종철 열사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

나는 붙잡혀서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까지 갔다가, 마지막에 방향을 틀어 옆의 호텔로 들어갔다. 취조실이 ‘만실’이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 그때 남영동에서 박종철이 고문치사로 죽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선배들은 대부분 체포됐다. 선배들의 고초와 투쟁은 박종철 사건에 이은 ‘6월 항쟁’ 속에서, 세계 최초 국민 모금으로 만들어진 국민주 신문 <한겨레> 탄생의 거름이 됐다.

1987년 대선으로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다. 이후 나는 한겨레신문 정치부에서 여당인 민정당에 막내 기자로 출입했다.

그 당에는 12·12와 5·18에 관련된 ‘무시무시한’ 신군부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말을 섞기 두려웠다. 어느 날, 수해를 입은 접경지역을 시찰하는 당 대표의 행사에 그 ‘무시무시한 사람들’과 함께 따라갔다. 행사 뒤 임진강변 장어집으로 갔다. 자연산 대형 장어가 상을 가득 채웠고, 분위기는 질탕해졌다. 그 장어는 인근 군부대가 잡아서 대령했다. 내가 정치인들을 ‘영감’이라고 호칭하는 선배 기자들의 언행을 흉내 내며 그들에게 말을 걸자, 그들도 당시 정치인들이 기자들을 호칭하는 ‘대감’이라고 맞받았다. “대감들이랑은 무서워서 말을 않겠다”거나 “대감, 술이나 드셔”라며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가득 따라줬다. 전형적인 장년 남성들의 시끌벅적한 술자리였다. 그날 이후 나는 신군부 인사들이 우습게 보였다. 그 뒤로는 그런 술자리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1988년 11월23일, 그는 국민 분노를 피해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이를 시작으로 ‘수난’이 시작됐다. 1995년 11월30일, 검찰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는 12·12 사건과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수사에 들어간다. 그가 소환에 불응하자, 사흘 뒤 검찰 수사관 9명이 그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그를 압송해 안양교도소에 수감했다. 12·12 쿠데타의 주역들이 법정에 섰다. 이듬해, 1심에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혐의는 군형법상 반란,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상관살해, 뇌물수수, 반란 등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고, 2년 만에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는 교도소를 나설 때 그간의 생활을 질문받자 “교도소 생활이라는 게… 아이고마, 기자 양반들은 교도소 가지 마소”라고 답했다. 나중에 그는 또 자신의 후예이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난하던 당시 야당을 향해 “달빛정책이라도 내놓고 비판해야 한다”며 여유를 부렸다.

이로부터 25년가량 흐른 지난 7월, 연희동 집 앞에서 그가 기자에게 “당신 누구요?”라고 소리치던 모습을 언론으로 접했다. 강골의 인상은 간 곳 없고, 헐렁한 양복을 입은 채 눈의 초점이 흐려진 그의 모습에서 생의 끝자락에 선 노인을 보았다. 지난 23일 전두환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 뒤, 찾아본 장례식장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싸구려 장터’ 같은 분위기였다.

극우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의 캐릭터 인형탈을 쓴 남성이 2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그날 아침 언론에서 본 한장의 사진이 겹쳐졌다. 사진 속에서, 그의 영정 앞에 서서 군모를 쓰고 거수경례하던 장년 사내의 두 양말 발뒤꿈치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지지자들 옆에 서 있다가 말을 걸었다. 그들은 “전두환 때는 취직도 잘되고, 경제가 안정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때 좋은 직장에 취직하셨나?”라고 묻자, “뭐, 이것저것하다가 장사했다”는 답이 왔다. 그중 한명은 잘해야 40대 중반으로 보여서, 전두환 시절에 취직할 연령도 아니었다.

전두환 시절에 취직이 잘됐다는 말은 잘해야 20%의 진실이다. 내 연배인 베이비붐 세대는 한 해에 100만명 내외가 태어났다. 그중 4년제 대학을 들어간 비율은 그가 대학 정원을 두배로 늘렸어도, 20% 안팎이었다. 그 이전에는 10%도 안 됐다. 그런데, 당시 사회나 언론에서는 이들 대졸자들의 취직에만 관심을 보였다. 대학을 못 간 나머지 80~90%의 취업 기회나, 일자리의 질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20% 내의 사람들은 당연히 기회가 많았고, 사회적 배려도 받았다. 그의 빈소에 모인 장삼이사들이 그 20%에 속해 혜택을 받은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이후 더욱 벌어진 우리 사회의 격차가 가져온 착종 때문일 것이다.

독재자 장례식장엔 지지자들 “그때 경제는 좋았다” 공허한 외침만

전두환 시대가 만든 계급 격차

전두환 시대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기득권 체제를 완성했다. 박정희, 전두환 때 상위 20%에게 먼저 파이를 나눠주면, 이들의 성장에서 생긴 과실로 다른 이들도 부유해질 것이라는 ‘트리클 다운’(낙수효과) 전략을 내세웠다. 전두환이 광주에서 피를 뿌리고, 언론을 통제하고, 노동조합을 억압하는 공포정치를 펼친 것은 결국 나머지 80%가 노력에 합당한 크기의 ‘떡’을 달라는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20%의 파이는 커졌으나, 나머지 80%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낙수’는 별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상대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가 권좌에 있던 1985년 2·12 총선 때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김영삼의 신당이 서울 강남 지역을 석권했다. 하지만,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직후 치러진 1988년 4·26 총선에서 ‘전두환의 후예’들이 있는 정당이 강남을 석권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남 불패’는 재벌 체제와 함께 기득권 체제의 상징이다.

그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열패감이 공고해졌다. 승자는 전두환 독재를 종식시킨 민주화운동 세력도 아니고, 기존의 보수세력도 아니다. 돈의 힘으로 학력과 신분을 세습해서 상류계층으로 고착화되는 사람들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계급’은 전두환 시대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탄생했다.

그가 죽던 날 새벽 5·18 피해자인 이광영(68)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계엄군의 총탄을 척추에 맞아서 평생 하반신 불구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의 빈소에서 발을 돌리며 80년대 대학 시절에 읽던 시를 다시 찾아봤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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