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 "유시민도 친해.. 생각 다른 이와 함께 앉을 벤치 많았으면"

김미리 기자 2021. 11. 2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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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서 시작해 백만 개 목표
'벤치 전도사' 된 건축가 유현준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설치한 벤치에 앉았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이 벤치 이름은 ‘따로 또 같이’. 의자 아래 레일을 달아 움직이고 회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은행 잎이 노랗게 물든 만추의 테헤란로. 벤치에 앉은 유현준(52)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를 보고 한 청년이 다가와 수줍게 사인 요청을 했다. “교수님 방송 보면서 건축이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알게 됐어요.” 길 가던 중년 여성도 스마트폰 꺼내 유 교수와 ‘셀카’를 찍었다. 연예인급 인기였다. “이래서 벤치가 중요해요. 휙 지나가면 사람들이 말을 걸 수 없을 텐데 잠시라도 머물러 있으니 타인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거죠.”

베스트셀러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 2′ 등으로 건축 대중화를 이끈 유 교수가 이번엔 ‘벤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서울 강남구와 함께하는 ‘세상의 모든 벤치’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하루 66만 명이 찾는다는 테헤란로에, 유 교수가 직접 디자인한 작품을 포함해 개성 있는 벤치 15개가 설치됐다. “테헤란로를 시작으로 전국에 벤치 100만 개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유 교수를 만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현준 표 박학다식은 강남 개발사부터 대장동까지 각종 이슈를 넘나들었다.

◇벤치는 ‘도시의 평상’

-도시의 많은 건축 요소 중 왜 작은 벤치에 주목했나.

“다리 힘도 없고 해서 서 있는 걸 되게 싫어한다(웃음). 계속 앉고 싶은데 서울엔 앉을 데가 별로 없다. 예전에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와 서울 가로수길의 벤치 수를 비교했더니 브로드웨이엔 170개, 가로수길엔 딱 3개가 있었다. 벤치가 왜 이렇게 없을까 생각해 봤더니 사회 갈등과 연결되더라.”

-사회 갈등과 벤치의 상관관계라니.

“2017년 ‘알쓸신잡’에 출연했을 때, 첫 방송이 나가고 반응이 뜨거웠다. 갑자기 페이스북에 댓글 3000여 개가 달리고 친구 신청도 쇄도했다. 처음엔 ‘신의 한 수 캐스팅’이라는 등 칭찬 일색이었는데 다음 날 어떤 사람이 몇 년 치 게시물을 다 뒤져 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캡처해 소위 ‘좌표’를 찍었다. 일주일간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그 경험이 건축의 사회적 의미를 더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유현준 교수가 최근 서울 논현동 사무실 꼭대기층에 만든 개인 공간. 일종의 '맨 케이브(man cave·남자들이 자신만을 위해 만든 취미 공간)'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어떤 의미인가.

“왜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무조건 틀렸다면서 배척할까, 극단적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을까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획일적 공간이 보였다. 우선 학교 디자인이었다. 똑같은 모습의 교실에서 교육받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보였다(그는 본지 칼럼에서 “양계장 같은 학교 건축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또 ‘공짜로 머물면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단 걸 알게 됐다. 마을 어귀에 놓인 평상 같은 공간 말이다. 그 역할을 벤치가 한다고 봤다.”

-벤치가 ‘도시의 평상’이란 얘기인가.

“그렇다. 야외에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어 너도나도 카페로 간다. 젊은이들은 PC방, 편의점, 코인 노래방을 찾는다. 벤치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야외 공간을 다 함께 쓸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벤치가 도시 아이덴티티가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는데 녹색 벤치가 놓여 있더라. 알고 보니 뉴욕의 ‘옐로 캡(노랑 택시)’, 런던의 빨간 공중전화 부스처럼 ‘코펜하겐 벤치’가 100여년 전 만들어진 디자인 고전이더라.”

덴마크 코펜하겐을 상징하는 '코펜하겐 벤치'. 100여 년 전 만든 '디자인의 고전'이다.

그가 테헤란로에 만든 벤치 이름은 ‘따로 또 같이’. 두 개의 벤치에 레일을 달아 움직이고 회전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강남에서 자란 ‘강남 키즈’로 안다. 테헤란로의 탄생과 성장을 봤을 텐데.

“구의동 주택에 살다가 1981년 압구정동 아파트로 이사 왔다. 구의동에선 어린이대공원을 앞마당 삼아 뛰어놀았는데, 지금은 상상도 안 되겠지만 강남으로 오니 야구 할 공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허허벌판에 신작로인 테헤란로만 뚫려 있었다. 내겐 고향이나 다름없는 강남을 왜 사람들이 혐오할까 궁금했다. 어느 날 보니 비싼 가게밖에 없더라. ‘돈이 없으면 머무를 자격이 없다’고 배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간적으로 거부당하면 반감이 생긴다. 그래서 공원, 벤치 같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공 공간이 중요하단 생각이 더 들었다.”

-벤치에 얽힌 추억은 없나.

“뉴욕에서 일했던 리처드 마이어(‘게티 센터’ 등을 만든 건축 거장) 설계사무소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일이 안 풀리면 거기 가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도심의 벤치는 창의력을 길러주는 보이지 않는 인큐베이터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설치한 벤치에 앉았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이 벤치 이름은 ‘따로 또 같이’. 의자 아래 레일을 달아 움직이고 회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정치? 난 건축가가 더 멋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대권 도전을 공식화하기 직전인 지난 5월 만난 인사 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태풍의 눈’ 같은 인물이라 좀 주저했는데, 부담 갖지 말고 보자더라.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강연이 있는 날, 그 주변에서 세 시간 정도 저녁 먹으면서 얘기했다. 내가 한 이야기는 칼럼과 유튜브 등으로 다 보고 왔더라. ‘밥 잘 사주는 형님’ 느낌이었다(웃음).”

-지난 2월 한 유튜브 방송에서 “신도시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역구 국회의원과 LH 직원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LH 직원들의 신도시 예정지 투기 의혹이 불거지며 ‘LH 사태 예언자’로 주목받았다. 윤 후보와도 LH 관련 얘기를 했다고 보도됐다.

“윤 후보가 ‘권력이 집중되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해 잘 안다’더라. ‘LH가 주도하는 택지 개발 같은 독과점은 시장경제 내에서 폐단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내 생각에 공감했다.”

-’대장동’ 사건은 어떻게 보나.

“관과 민간이 합쳐진 묘한 변종 비리다. 공공 주도형이지만 실제 개발은 민간이 했다. 민간 참여 비즈니스처럼 보이는데 관이 특혜를 주는 식으로 돌려서 이득 본 것 아닌가.”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민주당 이광재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 여야 막론하고 여러 정치인이 당신을 찾아왔다고 들었다.

“건축에 대한 정치인의 관심이 늘어났다. 청계천 복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면서, 건축 프로젝트를 하나 잘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긴 듯하다.”

-정치인을 만나는 것이 꺼려지진 않나.

“사회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 건축가의 목소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제스처다. 허구한 날 법대 나온 사람들만 모여서 의사 결정하는 사회가 아니라, 과학·건축·음악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정치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닌가.

“자꾸 나한테 나중에 공천받으려는 것 아니냐고 묻던데, 그럴 생각 전혀 없다. 어떤 위정자(爲政者)보다 건축가가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들보다 ‘건축계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 받은 건축가가 훨씬 멋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한테 왜 이스라엘 대통령 안 하느냐고 물으면 곤란하지 않은가(웃음).”

-’합리적 보수’라고 하던데, 맞는가.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라는 이분법을 싫어한다. 나는 정치 성향을 1차원 선(線)이 아닌 2차원 면(面)으로 본다. X축을 좌파·우파, Y축을 진보·보수로 한 4분면이 있다고 본다. 좌파이면서 보수인 사람도 있고, 우파이면서 진보인 사람도 있다.”

-유시민 등 좌파 인사들과도 친하던데.

“유시민 선생과는 낚시도 몇 번 갔다. 김제동씨하고도 친하다. 정치적 지향점은 다르지만 ‘브레인의 주파수’가 비슷하다. 대화하면 즐겁다. 요즘 우리 사회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말할 때의 기쁨’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나는 건축을 통해 인간의 공통점을 부각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빈부, 좌우 차이가 있다지만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시간과 공간 제약은 같지 않나.”

유현준 교수가 두 달 전 개설한 유튜브 채널 '셜록 현준'.

◇ 말로 하고 글로 쓰는 건축

-건축가의 길은 어떻게 가게 됐나.

“아버지가 기자였다. 기자는 늘 딴 사람 비판만 하지 뭔가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더라. 말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싶어 건축가란 직업에 끌렸다. 그런데 이렇게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돼버렸다(웃음).”

-학부(연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 하버드 두 군데서 석사를 했다. ‘학벌 깡패’라 불리기도 하던데.

“아버지가 ‘SKY’ 출신이 아니다. ‘간판’이 발목 잡아 편집국장 승진 때 계속 미끄러지셨다. 아버지가 승진에서 물먹은 어느 날 욕실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한(恨)을 풀어 드리겠단 생각에 명문대에 집착한 것 같다.”

-방송 활동, 인터뷰를 줄기차게 한다. 소진되지 않는가.

“해보니 나는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걸 글로 옮기는 스타일이더라. 이런 인터뷰도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라 즐겁다.”

-말을 쏟아내다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작은 오류를 저지를까 봐 겁나 아무 말 안 하는 것보다는 큰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숲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나무가 틀렸다면, 쿨하게 틀렸다고 인정하자는 주의다.”

-유튜브를 보니, ‘차박(차에서 자는 것)’을 사적 공간 부족으로 연결하는 등 건축적 시각으로 사회 현상을 쉽게 설명해줘 재밌다는 댓글이 많더라.

“아마 내가 어려운 건축 책을 안 읽어서 그런 것 같다(웃음). 다른 사람이 쓴 건축 서적을 잘 안 읽는다. 그들의 언어로 건축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

-관찰력이 좋은 것 같던데.

“어릴 적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고모들도 자주 왔다. 피 말리는 고부 갈등을 눈으로 지켜봤다. 아버지가 ‘두 여자 사이에 껴 본 적 없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을 하셨다(웃음). 대가족 경험이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관찰하는 기회가 됐다. 자연스럽게 건축할 때 그 공간에 살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가질까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관계성에 주목한 그의 디자인은 올해 ‘한국건축문화대상’을 탄 성남 운중동 ‘툇마루 하우스’에도 반영됐다. 모든 발코니에서 가족들이 서로 쳐다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유현준 건축사사무소에서 설계한 성남 운중동 '툇마루 하우스'. 올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이다. /사진가 신경섭

-교수, 건축가로도 바쁜데 이젠 유튜브(채널명 ‘셜록 현준’)까지 한다. 설계는 언제 하나(웃음).

“주중엔 학교와 설계사무소 일을 한다. 방송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유튜브는 주말에 한다. 일이 모두 연결돼 있어서 그렇게 어렵진 않다. 호리에 다카후미가 쓴 ‘다동력(多動力)’을 보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가운데 시너지가 생긴다’고 한다. 나도 그런 스타일 같다.” 2개월 전 개설한 그의 유튜브 구독자는 23만 명을 넘었다.

-일반인과 건축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지만, ‘아키테이너(건축가를 뜻하는 ‘아키텍트’와 연예인을 뜻하는 ‘엔터테이너’를 합친 말)’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아키테이너건 이키텍트건 상관없다. 선배 건축가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 선배들은 ‘건축가는 선비인데 세상이 우리를 안 알아준다’고 말했다. 체면 때문에 설계비 올려 달라는 얘기는 못 하면서 직원들은 만날 야근시켰다. 그럴싸한 말로 거대한 ‘담론’을 얘기하는 걸 멋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이 건축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건축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다. 요리사가 똑같은 재료와 양념을 갖고 다른 음식을 만들듯 건축가도 같은 조건에서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음식은 맛없으면 다음 끼에 맛있는 것을 먹으면 되지만, 건물은 한번 지으면 돌이키기 어렵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건축가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걸 알아주는 대중의 눈도 중요하다. 한국에 훌륭한 가수가 많은 것은 1990년대 음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좋은 인재들이 모이고, 대중 눈높이도 올라갔기 때문이다. 건축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책을 쓰고 방송에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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