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한글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2021. 11. 2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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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한자어 중 많은 것이
日서 만들어진 사실을 모르고 써
한글의 세계화도 중요하겠지만
외래어 아닌 한글 쓰려고 애써야

국제PEN한국본부는 얼마 전 제7회 세계한글작가대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제5회까지는 경주에서 개최했지만 작년과 올해, 코로나 사태 때문에 대규모 국제대회 개최가 불가능해 비대면 온라인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우리 삶 안에 속속들이 들어와 있는 한자어와 영어와 일본어를 애지중지 쓴다면 시민들은 이 대회의 의의를 체감하지 못할 테고 ‘쇠귀에 경 읽기’가 될 것이다.

행사 내용 중 노벨문학상 특별토론은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준비를 하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외국의 PEN 회장 6명과 화상으로 토론해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결론은 한국이라는 지역성의 세계화였고, 우수한 번역자의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합치면 지금까지 3명이 수상한 일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안에 또다시 일본인이 수상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면에서 침체돼 있는 우리 문학이 더 침체되지 않을지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심히 걱정된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시인
혹자는 일본은 일본이고 우리는 우리라면서 이런 우려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출판에 관한 한 역조현상이 너무 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의 소설은 국내에서 1000만권 이상씩 팔렸지만 한국 작가의 어떤 소설도 일본에서 빈약할 뿐이다. 유일하게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 10만권이 나갔을 때도, 20만권 판매를 넘어섰을 때도 한국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면서 대서특필했다.

우리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사용하는 기기를 가리켜 ‘리모콘’이라고 쓰고 있는데, 일본식 표기다. 이 기기의 원래 이름은 ‘리모트 컨트롤러’인데 너무 길어 이렇게 쓰지 않더라도 ‘리모컨’이라고 써야지 원어에 가까운 것이고, ‘리모콘’이라고 하면 일본식 영어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가 ‘리모콘’이라 외치게 된 것일까? ‘re’가 ‘다시’라는 뜻이 있어서일 테니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쓴 것이다. 다진 고기(たたき)에서 온 일본어인 다대기라고 쓰지 다진 양념이라곤 쓰지 않는다. 우리말 노늠이나 노느매기라고 쓰지 않고, 한자어 분배라고도 쓰지 않고 분빠이라고 흔히 쓴다. 운동복이나 연습복이라고 쓰지 않고 트레이닝복이라고도 쓰지 않고 추리닝이라는 일본식 영어를 쓴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76년이 됐지만 우리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일본어화한 영어를 쓰고 있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다.

가처분, 거래선, 견적, 구좌, 기라성, 납기, 내역, 노임, 대금, 매립, 매물, 불하 등 수많은 한자어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없으나 연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쓰는 한자어 중 정말 많은 것이 중국에서는 쓴 적이 없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임을 모르고 쓰고 있다. 아마도 관공서에서 쓰는 용어의 90% 이상이 한자와 영어일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우리가 한글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 예가 너무나 많다. 세종대왕이 통곡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옥사한 이윤재와 한징 선생이 통곡할 일이다. 이제는 한글의 세계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외래어가 아닌 한글을 쓰려고 애써야 한다.

국어사전에서 ‘ㄱ’쪽만 봐도 좋은 우리말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구뜰하다(보기엔 변변치 않은 음식이 맛은 구수하다), 가수알바람(뱃사람들이 ‘서풍’을 일컫는 말), 길차다(나무가 우거져 깊숙하다), 고자누룩하다(병세가 좀 수그러져 그만하다), 꺽지다(억세고 꿋꿋하다), 깨단하다(어떤 실마리로 인해 환하게 깨닫다), 건몸달다(혼자 헛애를 쓰며 몸이 달다), 간힘(숨을 억지로 참으며 괴로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힘), 귀잠(아주 깊이 든 잠), 결곡하다(빈틈이 없고 야무지다), 간사위(치밀하고 융통성이 있는 수단)라는 우리말을 아시는지? 이런 말이 사라진 자리에 외국어가 들어서고 있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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