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냉장고를 모르던 시대에 살았다면

오수현 2021. 11. 2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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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인류 / 심효윤 지음 / 글항아리 펴냄 / 1만7000원
냉장고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미지근한 맥주와 콜라를 마셔야 하고, 소고기는 구매 즉시 모조리 먹어치워야 한다. 계란도 우유도 보관할 곳이 없다. 그런데 인류가 냉장고를 갖게 된 건 불과 100여 년 전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역시 20세기 들어 태어난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류학자 심효윤은 저서 '냉장고 인류-차가움의 연대기'에서 인류학적 관점에서 냉장고를 파고든다. 냉장고를 통해 바라본 인류 식생활의 변화, 계급, 환경, 젠더 갈등, 가족 구성 변화에 따른 냉장고의 미래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냉장고는 얼음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투영된 역사적인 발명품이다. '냉장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제임스 해리슨이 1862년 런던 국제박람회에서 자신이 발명한 공업용 냉장고를 소개하자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이후 냉장고는 발전을 거듭해 1911년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이 첫 가정용 냉장고를 출시하는 데 이른다. 가정용 냉장고 보급은 3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연한 이래 음식 보관에 관한 한 커다란 진보가 없었던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한 게 20만년 전인 반면, 얼음을 완전히 지배한 지는 100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천연 얼음을 사용해 음식을 보관하던 인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미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금 당장 당신의 냉장고를 열어보라. 스페인산 냉동 삼겹살부터 노르웨이산 순살 고등어, 베트남산 냉동 새우, 전북 군산 특산물 박대까지 신선도가 생명인 육류·어류 식재료가 한가득이다. 음식의 염도는 냉장고 발명 전보다 현저히 낮아졌다. 그 이전엔 식품 보관 기간을 늘리기 위해 소금절임이 일반적이었다. 배탈과 설사도 줄었다.

인류는 이처럼 행복해졌지만 지구는 음식물 쓰레기로 몸살을 앓게 됐다. 먹다 남긴 음식물 쓰레기보다 보관하다가 버리는 게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윤리적 문제로도 이어진다. 지구 어느 곳에선 누군가 굶어 죽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입에 넣지도 않은 식재료들이 버려지고 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사람이 보인다. 영양제와 홍삼팩 등 건강보조식품과 아보카도, 오렌지, 파프리카가 가득한 냉장고라면 그 주인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일 것이다. 반면 빈자의 냉장고는 미니멀하다. 저자는 3개월간 1인 가구 부엌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중장년 독신자의 냉장고에선 주로 소주와 생수가 발견됐다.

1인 가구가 늘면서 냉장고를 이용하지 않는 가구가 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냉장고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일까. 빌트인 오피스텔에 사는 저자의 동료는 1인용 소형 냉장고를 갖고 있는데 냉장고에는 물과 수입 캔맥주뿐이다. "반찬은 냄새 나서 두지 않아요. 밥은 퇴근길 식당에서 먹거나 시켜 먹어요. 라면은 편의점에서 먹고요."

개인의 식습관을 넘어 시대상까지 반영되는 게 냉장고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어보라. 답이 보일 것이다.

[오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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