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짜장면에 와인 한 잔, 이상하지만 괜찮은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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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생활이 훨씬 즐거워진 시점이 있는데, 음식에 와인을 맞추면서부터다.
'짜장면과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은 무엇인가요?' 13만 집단지성의 친절한 댓글로 도출된 해답은 1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시라즈, 2위 미국 진판델이었다.
쏟아지는 졸음의 성격을 분석해보니 짜장면 섭취로 인한 더부룩한 수면욕이 아니라, 와인 시음에 의한 기분 좋은 알딸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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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카눈 더 래키 시라즈 VS 베런 서노마 카운티 진판델
와인 생활이 훨씬 즐거워진 시점이 있는데, 음식에 와인을 맞추면서부터다. 전에는 와인을 사다 놓고는 뭔가 근사한 안주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 후 지출은 줄고 만족도는 한층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습성이 생겼다. 내일은 매콤 주꾸미볶음을 먹을 건데 리슬링 한병 사다 놓을까, 저녁에 보쌈 먹을 건데 돼지고기에는 역시 샤르도네가 좋겠지, 이런 생각에 빠져들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근심을 잊게 된다. 하긴 먹을 때 행복한 사람이 진짜배기 행복꾼 아니겠는가. 하루에 두세번은 어김없이 행복이 찾아오니까.
그러고 보니 짜장면과 와인을 함께 먹었던 기억이 없구나. 짜장면은 제대로 만들면 정말 맛있지만, 기름지고 느끼한 뒷맛과 걷잡을 수 없이 몰아닥치는 더부룩한 졸음이 부담스러워 언제부터인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와인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다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고량주는 어떠냐고? 소주도 부담스러운 나에게 도수 높은 고량주는 난감하다. 그리하여 짜장면과 어울리는 와인을 모색하게 되었다.
동화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에게 척척박사 거울이 있다면, 나에게는 네이버 카페 ‘와쌉’의 질문 게시판이 있다. ‘짜장면과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은 무엇인가요?’ 13만 집단지성의 친절한 댓글로 도출된 해답은 1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시라즈, 2위 미국 진판델이었다. 단골 매장에 들러 오스트레일리아 시라즈로는 ‘킬리카눈 더 래키 시라즈’(1만8000원), 미국 진판델로는 ‘베런 서노마 카운티 진판델’(2만9800원)을 구입했다. 누가 짜장면에 더 어울리는지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다. 채점자는 나와 아내!
주문한 쟁반짜장이 도착했다. 윤기 좌르르, 흑갈색 춘장 소스로 코팅된 굵직한 면발을 한젓가락 헤집어 후루룩 흡입했다. 음, 고춧가루를 제법 뿌렸구먼. 맛을 음미하며 충분히 꼭꼭 씹어 넘기다 보면 치아와 잇몸이 눅진한 기름기로 코팅되어 난감한데, 이 순간 단무지 대신 와인을 삼켜 입안을 씻어 내린다. 오! 괜찮은걸? 이렇게 오스트레일리아 시라즈와 미국 진판델을 번갈아 마시며 아내와 의견을 나눴다.
“둘 다 산도가 좋아서 마무리가 개운하네.” “동의! 의외로 잘 어울린다.” “근데 진판델은 단맛이 살짝 있어서 시라즈가 좀 더 낫네.” “그 초콜릿 같은 단맛이 짜장면 소스의 단맛과 오히려 잘 어울리지 않아?”
모아진 의견은 대략 이러하다. 둘 다 산도가 좋아 느끼하고 기름진 뒷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잔당감을 선호하면 진판델, 드라이 와인을 원하면 시라즈를 선택하자. 초반에는 진득하게 들이대는 진판델이 다소 강세지만, 시라즈는 갈수록 맛이 정돈되고 풍미가 좋아져서 후반부에 대활약했다. 티브이(TV)프로에 출연한 맛 칼럼니스트라도 된 듯 주거니 받거니 평가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초저녁부터 눈꺼풀이 무겁다. 쏟아지는 졸음의 성격을 분석해보니 짜장면 섭취로 인한 더부룩한 수면욕이 아니라, 와인 시음에 의한 기분 좋은 알딸딸함이다. 짜장면 먹고 이렇게 흐뭇하게 졸린 건 난생처음이네. 마무리까지 좋았쓰! 시라즈, 진판델, 너네 무승부!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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