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처리' 되었던 농촌 여성에게 소설은 해방구였다[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11. 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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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삼백예순 날에서 삼백 날을 넘게 밭고랑을 기어다니고 소똥을 치우고 살아도 빚더미 속에서 다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는데 서방이라는 작자까지 흘리고 다니는 일거리가 발에 채여서 지 맘대로 나오는 숨도 조절해서 쉬어야 할 판이었다.”(‘이른 봄’)

정성숙 작가(56)의 첫 소설집 <호미>에는 “밭고랑을 기어다닌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농사는 그만큼 고된 일이지만 “농사꾼 모두가 부지런했던 죄의 값”으로 농산품 가격은 속절없이 떨어진다. 소설 속 농촌은 ‘공기 좋고 물 좋은 고향땅’이란 환상과 거리가 멀다. 일할수록 불기만 하는 빚더미만 널려 있다. 여성 농민의 삶은 그 속에서도 유독 신산하다. 수록작 ‘이른 봄’에서 귀숙은 “호적상으로만 경석의 아내일 뿐 실상은 머슴”인 신세를 한탄한다. 논밭에서도 축사에서도 집안에서도 아내들은 남편보다 더 많이 일한다. 그러고도 어른 취급을 못 받는다.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

소설 <호미> 펴낸 정성숙작가. 작가 제공

“날마다 숨이 막히잖아요.” 진도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정 작가에게 소설은 해방구였다. 농번기면 하루 17시간씩 일하고 귀가해 남편의 밥을 차렸다. 겨울이나 돼야 짬을 내 읽고 쓸 수 있었다. “내 인생을 방치하고 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40대부터 십수년간 틈 날때마다 소설을 썼고 2013년엔 등단도 했다. 그렇게 쓴 8편의 작품이 첫 책 <호미>로 엮였다. 떠나고 싶은, 그러나 떠날 수 없는 피폐한 농촌 현실이 그대로 담겼다. 지난 17일 전화 인터뷰로 정 작가를 만났다. 책을 낸 이유를 물으니 답 대신 질문부터 돌아왔다.

“농민 하면 남자가 떠오르세요, 여자가 떠오르세요?” 바짝 탄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여성은 농민에 포함되지 않는 거예요. 노동량은 오히려 남성보다 많은데,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배당되는 몫도 거의 없어요. 누군가는 보여줘야 하는 게 맞잖아요.”

수록작 ‘기다리는 사람들’ 속 미애는 “평생을 밭고랑 기어 댕겨서 손에 쥔 것”이라고는 “이녁(자기) 새끼나 알아주는 훌륭한 골병에다 쳐다보기도 아깜 빚덩이밲에” 없다. 남편의 주먹질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 미애는 “컴퓨터에 나타난 전화선 너머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농사 외의 다른 세계를 봤다”면서 집을 나가버린다. 마을에는 “콤피터랑 연애”했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표제작 ‘호미’의 주인공 영산댁은 왼몸이 마비된 채 외딴 밭에 홀로 방치된다. 명의가 제 앞으로 돼 있다는 이유로 밭을 멋대로 팔려는 아들을 말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결국 호미 하나에 의지해 산 아래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정성숙 작가의 소설 ‘호미’ 속 소설 속 농촌은 ‘공기 좋고 물 좋은 고향땅’이란 환상과 거리가 멀다. 일할수록 불기만 하는 빚더미만 널려 있다. 여성 농민의 삶은 그 속에서도 유독 신산하다. 사진은 이미지컷

“들에서 밥 먹을 때 있죠? 80대 할머니에게 먼저 식사를 권하면, 30대 젊은 남자 보고 ‘어른 먼저 먹어야 한다’고 해요. 집이나 논밭, 하다 못해 전화기까지 남자 명의로 돼있어요. 이게 농촌의 보편적인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소설에서 노동의 주체는 대개 여성들이다. 정 작가는 “농촌에선 대개 남자들이 트랙터 같은 농기계를 전담하고 부차적인 일은 모두 여자들에게 몰리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량이 더 많다”고 말했다. 책에는 농사꾼부터 재래시장 상인까지 억척스레 일하는 다양한 직업의 농촌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에 반해 남성 인물 다수는 무기력하고 무능해보인다. 일은 뒷전이고 돈 혹은 결혼에만 몸 달아있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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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보조적이고 의존적이라고만 생각하는 남성 중심의 생각에 익숙하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농촌에선 여성이 당당하고 목소리도 커요. 굉장히 주체적인 경제 활동을 하고 있고, 일도 실제로 많이 하기 때문이에요. 남성의 힘과 사회적 상황에 눌릴 뿐이죠. 지금까지 남성들이 쓴 활자에는 이런 모습들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여성 농민이 주인공인 소설을 보니 상대적으로 남성이 무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렇게 표현할 의도는 없었죠.”

농촌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는 물론 여성 농민만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안 짓는 것이 그중 효율성이 높”은 모순의 땅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이들 대부분이 고통받는다. 정 작가는 “문제는 농산물 가격”이라고 했다. 소설마다 시세가 땅에 떨어진 대파, 고추, 배추 때문에 눈물 짓는 이들이 보인다. 풍년은 자주 원수가 된다. 그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 다른 나라 농민들하고 경쟁해서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구조”라며 “농민들 위치도 농산물 가격과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국가 정책이나 미디어에서 늘 제외된 농민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끌고 싶었다. ‘재미’에 더 집중한 이유다. 남도 지역의 입말과 생활상이 묻어나는 속담들이 고단한 이야기에 경쾌함을 준다. “각시 없다고 아무 데나 씨 뿌리고 댕겼다가는 탄저병 걸린다야” “그리 바쁘면 함씨(할머니) 속으로 빠지제 어째서 엄매 속으로 빠져”와 같은 걸쭉한 농담들이 단정한 서사들과 어우러져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정 작가는 “드론이나 자율주행트랙터가 등장했지만 호미로 풀을 뽑아야 하는 원시적 고달픔은 여전”하다며 “천한 일은 호미를 쥔 자들의 몫”이라고 썼다. <호미>는 세상이 잊은 ‘원시적 고달픔’에 언어를 선사하는 책이다. 대학 진학 이후 서울에 산 8년 외에는 평생을 진도에 살며 흙과 함께 고투한 정 작가의 삶이 살벌하리만치 생생한 언어를 만들어냈다. 사진 작가 제공

현실에서도 문단에서도 ‘농촌’ 특히 ‘농촌 여성의 삶’은 거대한 빈칸이었다. 존재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묵음 처리’된 공간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정 작가는 “드론이나 자율주행트랙터가 등장했지만 호미로 풀을 뽑아야 하는 원시적 고달픔은 여전”하다며 “천한 일은 호미를 쥔 자들의 몫”이라고 썼다. <호미>는 세상이 잊은 ‘원시적 고달픔’에 언어를 선사하는 책이다. 대학 진학 이후 서울에 산 8년 외에는 평생을 진도에 살며 흙과 함께 고투한 정 작가의 삶이 살벌하리만치 생생한 언어를 만들어냈다.

정 작가는 여전히 농사일에 치여산다. “멘탈을 논에 맡겨두고 사는 형편”이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다. “아주 당차게 사는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들이 많아요. 남편을 들러리로 두고 가족 경제를 꾸려가는 여성들이 여럿 있어요.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좀 써보고 싶네요.”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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