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쪽방촌이지만 우리에겐 삶의 터전입니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유경선 기자 2021. 11. 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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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지음 | 후마니타스 | 320쪽 | 1만7000원

남산이 가깝고 서울역이 지척인 곳
먹고 살려고 상경해 마음 붙인 곳
수급비 78만원인데 월세가 25만원
폐지 줍고 허드렛일이라도 하려면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사람들
재개발 추진으로 절반이 밀려났다
왜 이곳에 계속 살아야만 하는지
8명의 생생한 사연으로 호소한다

양동 쪽방촌 한가운데에서 힐튼 호텔 건물이 보인다. 쪽방촌에서 호텔로 바로 이어지는 길은 없다. 홍서현 활동가 촬영. 후마니타스 제공

서울 남대문경찰서와 밀레니엄 힐튼 호텔 사이쯤 수십년 가난의 역사가 쌓인 양동 쪽방촌이 있다. 볕이 잘 드는 곳이라 양동(陽洞)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지금은 주위를 둘러싼 고층빌딩들에 가려 하루 대부분이 응달인 곳이다.

양동에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다. 각종 사연을 안은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무작정 서울역까지 온 뒤 물어물어 오는 곳이기도 했다. 동네의 반 이상이 성매매 업소인 때도 있었다. 사회는 빈민가·사창가·우범지대의 대명사가 된 이름 ‘양동’을 거부했고, 이 지역은 1980년에 ‘남대문로5가동’이 됐다. 양동이란 이름은 이후 한동안 그늘 안에 머물다가 재정비사업이 발표되며 다시 떠올랐다. 이후 전개는 익숙하다. 양동 쪽방촌에 마음 붙이고 살던 사람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2019년 10월 확정된 이후 2년 새 주민이 절반으로 줄었다.

‘홈리스행동’의 생애사 기록팀 11명이 양동에서 계속 살고 싶은 8명의 이야기를 2020년 10월29일부터 2021년 11월1일까지 1년 동안 듣고 정리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의 빈곤이 개인의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왜 살고 싶은 곳에서 쭉 살 수 있어야 하는지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들 중 일부는 가명으로 기록됐다. 책은 ‘홈리스’라는 용어를 노숙인과 쪽방·고시원 등 최저 주거기준을 갖추지 못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총칭으로 썼다.

홈리스행동의 2019년 실태조사 결과 주민의 83.1%는 재개발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살고 싶다고 답했다. “동네가 익숙하고, 교통이 좋고, 이웃들과 함께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 남산이 가깝고 서울역이 지척이니 양동은 분명 좋은 동네다. 홈리스들이 왜 이 좋은 지역에서 계속 살아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8명이 1년 동안 꺼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도리어 ‘왜 그들이 양동에 계속 살 권리를 주장하면 안 되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활동가는 “가난한 이들일수록 도심에 있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근거도 보탠다.

책에 실린 쪽방촌 주민 8명의 이야기는 이들의 현재를 필연적 귀결로 느끼게 한다.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이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돈 몇 푼 쥐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 대다수 서울살이의 시작이다. 가족의 죽음, 배신, 질병, 사고 등 갑작스러운 불운이 이들을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았다. 이악스럽게 일해서 거의 일궈놓은 기반이 ‘IMF 외환위기’에 허물어지기도 했다. 완충지대 없이 가난의 파도를 맨몸으로 맞았다.

2021년 10월29일, 빌딩숲 사이로 보이는 양동 쪽방촌 모습. 이재임 활동가 촬영. 후마니타스 제공


“남대문 중국집 배달로 시작해서 싸완(잡일 담당), 칼판(재료 손질 담당), 주방장까지 다 해봤”다는 문형국씨(63)는 “열일곱, 열여덟”쯤 서울에 처음 올라와 양동에 정착했다. ‘시다’, 미싱, 자수, 가방공장 일 등을 거쳐 중국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착실하게 돈을 벌어 “청계천 금성거리 가서 테레비를 한 14만원 주고” 사서 시골집에 부치기도 했다. 중국집 장사를 시작하고 4년이 지나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무거운 중국집 프라이팬을 계속 들다가 류머티즘 관절염이 생겼다.

부산에서 태어난 김강태씨(64)는 해군 입대를 계기로 14년간 외항선을 탔다. 이란, 이라크, 캐나다 몬트리올, 미국 시카고, 브라질 등을 돌아다녔다. 공무원 월급의 두 배 정도를 벌 수 있었다. 아버지와 큰형 부부가 그가 보내준 돈의 덕을 봤다. 김씨의 불행은 가족의 배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 부부는 김씨를 홀로 남기고 유산과 집을 챙겼다. IMF 외환위기 이후 서울로 갔다. 일 말고 “봉사나 하러 가볼까 싶어” 장애인 시설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원장은 장애인 수급비에 손을 대는 “도둑놈 중의 쌍도둑놈”이었다. 양계장과 돼지농장에서도 일을 했다. 김씨는 양동 재개발 과정에서 주민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장영철씨(66)는 바지사장으로 명의를 도용당했다. 세금이 8억원이 나왔다. 장씨도 모르는 휴대폰들이 마구 개통돼 800만원의 통신요금도 남겼다. 그전에는 조직폭력배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며 장씨를 유인해 ‘햇살론’을 2000만원 대출받게 한 뒤 돈을 챙겼다. 홈리스들을 대상으로 한 흔한 ‘명의도용’ 범죄다. 세금은 빚과 달라 쉽게 탕감되지도 않는다. 돈을 모으고 싶어도 세무당국이 알아챌까봐 두렵다. 그는 “돈을 좀 모아도 된다는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염전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이석기씨(66)도 역시 비슷한 사기를 당했다. 한때는 홈리스들을 유인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일도 잦았다. 정신의료기관이 기초생활수급자를 입원시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지급받을 수 있는 입원치료비가 있기 때문이다. 김강태씨도 김기철씨(63)도 이렇게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쪽방촌 건물주 대부분은 강남에 산다. 이들은 무허가 임대업자인 ‘관리자’를 고용해 쪽방촌 입주민들을 ‘관리’한다. 임대의 임대를 하는 구조다. 건물주들은 건물 인테리어나 보수 등 각종 이유를 대며 주민들을 내쫓는다. 두어 달 치 정도 월세를 빼주겠다는 말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다. 이들이 감당해 온 월세의 규모를 보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5㎡(1.5평) 쪽방에 25만원 월세. 99㎡(30평)로 환산하면 400만원이다. 웬만한 중산층도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다. 기초생활수급비 78만원의 3분의 1이 이렇게 높은 월세를 감당하는 데 쓰인다. 11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강남 타워팰리스 1차의 월세 시세가 105㎡(32평)에 300만원이다.

어차피 수급비로 내는 돈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가난에 치인 몸과 마음은 성하지 않고, 그 신체로 어엿한 월급을 주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수급비로만 살아갈 수도 없다.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50만원 남짓이다. 이들은 소득이 잡히면 “수급이 잘릴까” 걱정하며 폐지를 줍고 허드렛일을 한다. 이러한 비용을 치르고도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누가 당연히 떠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행히 지난 10월 재개발 지역 내 임대주택 건설이 결정됐다. 이동현 활동가는 임대주택 용적률이 높아질 것을 걱정한다. “지금 쪽방들은 높아봤자 3~4층이에요. 그래서 공터 같은 데로 나와 이야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술도 먹고 그럴 수 있는 거죠. 안에서 문을 잠그면 열어볼 수 없는 아파트 형태로 높이 쌓이게 된다면 고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죠. 사람들이 문 열고 나와서 얘기할 수 있는 광장 같은 공간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돼요.”

생애구술사 작가 최현숙은 책의 맺음말에 “홈리스 자신의 입으로 자기 경험과 생애 기억을 말하도록 돕고, 그간 겪어온 다양한 어려움들(빈곤, 탈가정, 관계 단절, 질병, 중독, 노숙, 범죄, 낙인, 자괴 등)이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간 연령 성별 사회 문화적 배경 차이가 컸다. 이 때문에 “화자의 말과 청자의 질문은 서로 미끄러지곤” 했다. 그는 “다행(임대주택 건설)을 발판으로 이 마을에서 돈과 가족을 넘는 사람다운 사회의 시작이 가능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한다”며 싸움은 계속 치열하게 이어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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