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모든 빛나는 존재".. 동·식물에 바치는 헌사

기자 2021. 11. 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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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베스트셀러 ‘메이블 이야기’의 작가 헬렌 맥도널드가 신간 ‘저녁의 비행’을 출간했다. 저자는 ‘사라질 인간’이 ‘사라지지 않을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저녁의 비행 │ 헬렌 맥도널드 지음 │ 주민아 옮김 │ 판미동

둥지떠난 칼새 2~3년 비행하다

여름 저녁 돌연 솟구쳐 사라져

신과 만나는 장엄한 ‘저녁기도’

동식물 대한 풍부한 지식·묘사

인식의 틀을 뒤흔드는 ‘산문시’

불멸의 자연앞에서 ‘겸손’ 강조

16세기 유럽 귀족들은 작은 나무상자나 진열장에 세상의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해서 담아두고 때때로 들여다보면서 감상하는 경이의 방, 즉 분더캄머(Wunderkammer)를 만들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메이블 이야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헬렌 맥도널드는 신간 ‘저녁의 비행’에서 자연에 대한 관찰과 매혹으로 가득한 에세이 41편을 모은 아름다운 방을 열어젖힌다.

다른 새와 달리 칼새는 어릴 적 한 번 둥지를 떠나면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곤충을 잡아먹으면서 2∼3년 동안 비행을 멈추지 않는다. 이 천사 같은 새는 여름날 저녁이 되면 신의 부름이라도 들은 듯 갑자기 솟구쳐서 사라진다. 이를 저녁 비행(vesper flight)이라 한다. 라틴어 베스퍼(vesper)는 저녁, 그 파생어인 베스퍼스(vespers)는 경건한 저녁기도를 뜻한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칼새는 인간의 시선을 넘어 신과 만나는 장엄한 저녁기도를 올리는 셈이다. 저자는 이 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면서 책 제목으로 삼았다.

저자는 영국 런던, 미국 뉴욕, 호주 블루마운틴, 아일랜드 더블린 등 인생 여행에서 만난 송골매, 찌르레기, 토끼, 소, 돼지, 백조, 버섯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빛나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펼쳐낸다. 마치 저자와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생생한 묘사, 대상 동식물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과학적 지식, 자연과의 만남이 가져온 독특한 감각과 내밀한 감정에 관한 섬세한 탐구는 이 책을 문학으로 만든다. 모든 글이 우리의 감각을 혁신하고 인식의 틀을 뒤흔들어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이끄는 산문시처럼 읽히는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을 동식물에 투사하는 상식적 접근인 ‘자연의 인간화’를 경계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교훈이나 깨달음을 주려고 존재하는 거울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희망을 자연에 덮어씌우는 것은 다른 모든 생명체가 마치 인간을 위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섯 번째 멸종이 진행 중인 상실과 소멸과 위기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인간의 눈이 세계를 보는 유일한 눈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가령 송골매의 눈으로 본 세계를 떠올리면서 온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풀백 발전소 굴뚝 탑은 더블린 어디에서든 보인다. 이 탑에 송골매가 둥지를 틀고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송골매의 사냥 구역은 인간의 구획과 상관없이 강가, 부두, 거리, 공원, 골프장 등으로 넓게 퍼져 있다. 함께 도시에 적응한 야생 비둘기들을 먹이 삼는 이들은 인간과 다르게 더블린을 사용한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과 달리 도시는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다. 수많은 동식물이 이미 숲을 떠나 도시로 이주해 살고 있다. 도시의 발밑 몇 m만 파고들어도, 상공 수십m만 올라가도 인간이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생태계가 펼쳐진다. 개발업자가 고른 땅 아래에는 씨앗들이 때를 기다리고, 상공 200m만 올라가면 바람을 타고 철새들, 곤충들, 풀씨들이 대기 생태계를 이루면서 날아다닌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가서 하늘 높이 떠가는 철새들을 관찰하는 장면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강한 불빛에 새들이 길을 잃고 안타깝게 죽어가는 것은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도시와 자연을 나누고, 자연에 등 돌리고 사는 것은 편협한 시선에 불과하다. 인간의 눈을 벗어나면 자연은 여전히 살아 있다. 풀백 발전소는 자연을 정복한 산업 문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100년도 못 가서 문을 닫았고, 결국 마천루와 마찬가지로 송골매의 새로운 절벽이 됐다. 인공의 필멸과 자연의 불멸을 이보다 선명히 증언하는 것은 없다. 저자는 사라질 인간이 사라지지 않을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반복해 강조한다. “우리는 이 세계를 위해 외칠 수 있고, 행진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변화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기적은 거기에 있고, 우리가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488쪽, 1만8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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