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와 정시확대는 '따뜻한 아이스커피'처럼 모순

이유진 2021. 11. 26.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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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남은 교교학점제 '시기상조론']
교육과정-입시제도 엇박자 혼란..양질의 교원 확보도 안돼
조국사태 뒤 '정시 40%이상' 권고로
학점제 맞춤한 학종 비율↓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3일 고교학점제 선도학교인 전북 전주 완산고를 방문해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교육부 제공

“고교학점제와 정시 확대 기조인 현행 대입제도는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불협화음을 낸다.”(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

학생이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대입에서 과목 이수 경로 등을 인정받는 고교학점제는 현행 대입 전형 가운데 수시 학생부종합전형(학종)과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오지선다형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나 내신등급이 중요한 학생부 교과전형은 고교학점제와 조응이 어렵다. 교육부의 <‘학교가 나에게 맞추다’ 학점제형 교육과정 운영사례집>(이하 사례집)을 보면,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한 교사는 “학생들이 성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소신 있게 소수 과목을 선택했다면 대학에서 이를 충분히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런 전형은) 학종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2023년부터 부분적으로, 2025년부터 전면적으로 도입하기로 한 고교학점제가 입시제도와의 엇박자로 시행 전부터 우려를 낳고 있다. 정시를 확대하면서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는 모순을 해결할 정부의 의지가 보이지 않고, 그 모순으로 인한 부담은 오롯이 학교와 학생·학부모가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를 밀어붙이면서도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는 학종 비중을 되레 축소했다.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대입 공정성 강화를 이유로 학종과 논술 위주 전형 비중이 45% 이상인 서울 소재 16개 대학에 2023학년도 대입까지 정시모집 비율을 40% 이상 올리도록 권고한 것이다. 그 결과 이들 대학의 학종 비중은 2021학년도 평균 45.6%에서 2023학년도 34.2%로 11.4%포인트 떨어졌다. 고교학점제는 교육과정과 평가방식, 입시제도가 한 묶음으로 바뀌어야 하고 지금쯤이면 이를 하나로 꿰는 일관성 있는 전망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정시 40% 룰’로 인해 고교 수업이 고교학점제와는 맞지 않는 과거 수능 문제풀이식 교육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펴낸 정책자료집 <고교학점제, 어떻게 어디쯤 가고 있나>를 보면 고교 교사들은 “정시 확대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안착과 고교학점제 기반 조성이라는 고교 교육 전반의 혁신 동력을 잃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꼽았다.

주로 학종으로 학생들을 주요 대학에 진학시켜온 비수도권 일반고에서는 고교학점제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다. 교육부 사례집에조차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은 서울 주요 대학에서는 정시를 확대하고 있어 중소도시의 일반고 입장에서는 우려되는 지점이 많다”는 한 지역 고교 교장의 우려가 담겨 있다.

교육정책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된 사교육 과열 양상도 ‘예고’된 것과 다름없다. 2025년 고교학점제가 전면 도입되더라도 1학년이 배우는 공통과목은 여전히 석차등급을 병기하는 상대평가로 남게 되면서 공통과목 중심으로 사교육이 늘어날 수 있다. 교육부는 2024년 2월 성취평가제 확대(공통과목을 제외한 선택과목은 석차등급 없는 5단계 절대평가로 전환)까지 반영한 2028학년도 ‘미래형 대입’을 발표할 예정인데, 교육계에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다.

교육부 관계자는 “공통과목은 평가제도로 인해 과목 선택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데다, 성취평가 확대 뒤 내신 부풀리기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완장치 차원에서 (상대평가로) 남겨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경원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은 “공통과목이 상대평가로 남아 있는 한 과도한 경쟁은 불가피하다”며 “결국 내신 변별력을 위해 공통과목을 상대평가로 남겨둔 셈인데, 사실 변별력 문제는 대학이 걱정할 문제이지 교육당국이 이를 이유로 교육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시와 수시 비중이 살짝 출렁이기만 해도 학교 현장의 혼란이 극심한데 교육당국의 인식은 현장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4일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을 전제로 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 브리핑에서 “지금과 같은 수능을 반영하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혁신적인 교육과정 개정이 예고돼 있다”며 “지금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미래형 대입은) 정시와 수시 비율 조절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래형 대입의 ‘시안’은 2023년 상반기께나 마련될 예정이다.

고교학점제에 조응하는 ‘입시 방정식’을 푸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선결과제는 학생들의 다양한 과목 수요를 감당할 양질의 교원 확보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교원대 연구진은 교원 주당 수업시수 12시간과 학급당 학생수 14명 등 이상적인 조건을 적용하면 전 과목에서 현재보다 8만8106명의 교원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실에 가장 가까운 조건(주당 수업시수 15.1시간, 학급당 학생수 24.5명)을 적용해도 사회(865명)와 기술가정(675명) 등에서 교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충분한 교사 증원 없는 고교학점제는 단순히 교사들의 업무 과중으로 끝나지 않고 교육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교육부는 학생 선택 과목수가 연구학교 도입 이전에 견줘 34% 증가했다는 점을 그동안의 추진 성과로 꼽고 있다. 지난해 7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84곳을 조사한 결과, 평균 과목수가 30.2과목에서 40.6과목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는 늘어난 과목 수요를 기존 교사들이 무리해서 감당한 결과다. 지난 7월 전교조가 연구·선도학교 분회장과 담당자 54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3과목 이상을 담당하는 교사가 있다’고 응답한 경우가 전체의 91.3%였다. ‘4과목 이상 담당하는 교사가 있다’는 응답도 27.7%에 달했다.

고교학점제와 학급당 학생수 감축 등을 반영한 새로운 교원 수급 계획은 내년 상반기께 나올 예정이다. 교육부는 미래형 교원 수급에는 개설과목 증가, 학업설계, 미이수 지도 등 고교학점제에서의 교원 수요를 고려한 새로운 수급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박사 학위 이상의 자격을 가진 학교 밖 전문가를 현재 고등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과목에 한해 시간제 근무 기간제교원으로 활용하는 법안이 지난 4월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 교원 우선 확충에 방점을 찍은 교원단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를 섣불리 도입했다간 교사·강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농산어촌 학생들의 교육 격차만 더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경북 지역의 한 고교에서는 한 학기 동안 4번이나 강사가 바뀔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차원에서 교통비를 최대한 보장했지만 이동거리가 멀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전북의 한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교사는 “교육부는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이 만능인 것처럼 말하지만 코로나19 이후 2년 동안 원격수업의 한계를 여실히 깨달았다”며 “더구나 지역 학생들은 도시에 견줘 더 고립되어 있는데 다시 온라인에 가둬둘 수는 없다”며 지원 강화를 요구했다. 한 교육부 관계자는 “고교학점제가 지역별 편차 없이 이뤄지려면 교원이 전국적으로 두루 배치될 필요가 있어 새 교원 수급 계획을 마련하면서 이 부분을 주요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정권 1년 남겨두고 도입 시기 앞당겨 `반발' 자초
[문재인 정부 5년간 뭐했나]

고교학점제가 시기상조론에 부닥치게 된 데는 임기 내내 고교학점제 추진에 지지부진했던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교학점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절대평가제 전환과 더불어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교육공약으로 꼽혔다. 국·영·수 내신과 수능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줄세워온 현행 고교 교육 체계를 뜯어고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정권 출범 1년 만인 2018년 8월 교육부는 ‘2022학년도 대입개편안’을 발표하고 수능 절대평가제 전환은 포기한 채 되레 각 대학에 정시 전형 비율을 30% 이상 확대하라(2019년 40% 이상으로 추가 확대)는 권고를 내놨다. 동시에 고교학점제의 전면 도입 시기는 2022년에서 2025년으로 유예했다. 당시 “전면 도입 시기가 현 정부 임기 이후라 사실상 지킬 수 없는 공약이 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후 2019년 11월 ‘일반고 역량 강화 방안’ 가운데 하나로 고교학점제가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성취평가제 도입 범위 등이 정해지지 않은 등 미완성의 상태였다. 교육부는 올해 2월에야 일반선택과목까지 성취평가제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고교학점제 종합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임기를 1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정권 말에야 시동을 거는 모양새건만, 도입 시기를 다시 2년 앞당겨 2023년 고1부터 고교학점제를 부분 적용하기로 하자 이번에는 현 중학교 1, 2학년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졌다. 전경원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은 “상대평가로 인한 과목 선택 ‘눈치보기’로 고교학점제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질 수도 있는데, 차기 정부에서 고교학점제 좌초를 우려한 교육부가 무리한 결정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대못 박기’는 오해”라며 “2018년부터 연구·선도학교를 운영했고 올해 기준 일반고의 55.9%가 연구·선도학교인 점을 고려하면 내년까지는 고교학점제의 도입 기반이 어느 정도 마련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결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고교학점제 도입을 찬성하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우군’이 사라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고교학점제가 모든 아이들이 배움과 성장에서 소외되지 않는 교육과정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면서도 “교육부가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한 환경은 만들지 않고 추진 일정만 잇따라 발표하다 보니 현장에서 고교학점제 자체에 대한 반감·저항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고교학점제를 미리 경험해본 연구·선도학교 선생님들이 2023년 도입에는 더 반대하는 분위기예요. 서둘러봤자 지금의 혼란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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